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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 신화서 몰락까지'…故 김우중 파란만장 인생

  • 송고 2019.12.10 08:42 | 수정 2019.12.10 08:58
  • 박상효 기자 (s0565@ebn.co.kr)

31세 창업, 재계 2위로 키운 세계경영 신화...41조원 분식회계로 몰락

베트남서 사업가교육 중 건강악화로 작년 귀국…아주대병원서 말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 이후 주로 베트남에서 지내던 김 전 회장은 지난해 말 건강 악화로 귀국했으며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 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주도한 1세대 기업인이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이 사재를 출연해 세운 아주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난 1년여 동안 입원을 거듭한 것으로 전해졌다.

1936년 대구 출생인 김 전 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추앙받다 외환위기 직후 부도덕한 경영인으로 내몰리기까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한국전쟁으로 부친이 납북된 이후 서울로 올라와 당시 명문 학교인 경기중과 경기고를 나왔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다 만 30세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이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히며 성장했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다.

1970년대 경제성장과 중동 붐, 수출 호조에 따라 급격하게 사세를 확장했고, 특히 당시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단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1972년에는 국내기업 수출 5위를 기록하는 등 파죽지세였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어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였으나, 외환위기 때 부도를 내고 해외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김우중 전 회장은 ‘세계경영’으로 유명하다. 대우그룹 전성기 때는 1년 중 280일 이상 해외에 체류하며 수백여 곳의 현지법인과 해외 네트워크를 직접 챙겼다.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을 확장해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로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1990년대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1천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하기도 했다. 고인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 명을 기록했다. 당시 고인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아울러 김 전 회장은 21조원대 분식회계와 9조9천800억원대 사기대출 사건으로 2006년 1심에서 징역 10년, 추징금 21조4천484억원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징역 8년6월,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으로 감형됐으며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과거 자신이 시장을 개척한 베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머물며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왔다.

고인은 지난해 8월 말 베트남 하노이 소재 GYBM 양성 교육 현장을 방문하고 귀국한 이후 건강이 안 좋아져 통원 치료를 하는 등 대외활동을 자제해오다 12월 말부터 증세가 악화해 장기 입원에 들어갔다고 대우 관계자는 밝혔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행사가 마지막이다. 대우그룹 임직원들은 1999년 그룹 해체 이후에도 매년 창업기념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해왔으며 김 전 회장을 포함해 300여명이 참석해 왔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1년여 간 투병 생활을 했으며 평소 뜻에 따라 연명치료는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고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예정됐으며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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