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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1호 판매대리점' 한일철강…"60년 한국 철강의 역사"

  • 송고 2017.12.05 17:00 | 수정 2017.12.05 15:57
  • 박상효 기자 (s0565@ebn.co.kr)

고 엄춘보 창립자, 탁월한 선구안과 '성실' 강조한 일평생

철강 유통에서 생산까지...한일철강, 60주년 "100년을 향해"

故 엄춘보 명예회장이 설립한 한일철강이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했다. 창립일인 12월 5일은 1957년 한일철강 설립자인 故 엄춘보 회장이 한일철강을 설립한 날이다.

▲ 고 엄춘보 회장 "철판은 정직하고 유행을 타지 않는 상품"

고 엄춘보 한일철강 청립자.

고 엄춘보 한일철강 청립자.

지난 2014년 2월 타계한 고(故) 엄춘보 한일철강 명예회장은 58년 동안 철강업에 종사하면서 성실, 근면, 검소를 강조했다.

초창기부터 한일철강의 사훈은 성실, 근면, 인화, 창의다. 엄춘보 회장은 이 중에서도 성실을 더욱 강조했다. 성실은 그의 95세까지 현역 생활의 기본 정신이었다.

엄춘보 명예회장은 지난 191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엄 회장이 철강업과 연관을 맺은 것은 1945년 결혼하면서 부터다.

장인은 만주 봉천(심양)에서 강덕금속공업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운영했는데 선반 70여대를 보유하고, 고철을 회수해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다. 엄 회장은 장인과 함께 경영에 참여하면서 철강과 첫 인연을 맺는다.

그는 만주에 있을 때 재산가 장인을 뒀지만 일제가 패망한 이후 공산정권에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 그는 가족과 함께 월남했는데 가진 돈은 4000원이 전부였다.

엄 회장은 을지로에 가게를 얻어 카바이트 장사를 시작해 큰 돈을 벌게 됐다. 당시 북한은 수력발전소가 있어 전력공급이 풍부했지만, 남한은 제대로 된 발전소가 없어 전력난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전력난이 가중될 것으로 알고 대처한 것이다.

하지만 곧 6.25 전쟁이 일어났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2년 뒤 다시 서울로 돌아온 엄 회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주택과 건물을 복구하기 위해 건축자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협성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함석(아연도장 철판제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이후 사업은 엄 회장의 예측한 대로 폐허가 된 서울의 전후 복구와 주택개발과 맞물려 번창했다. 이어 신화실업이라는 함석공장에 투자를 하게 되면서 경영자로서 기반을 다졌다. 당시 전쟁 이후 많은 생산시설이 파괴되고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그는 건설자재가 필요할 것을 예측하고 함석제품을 정했던 것이다.

엄회장은 어느 정도 전쟁 복구가 진행되자 사업 아이템을 철판으로 품목을 바꾸고 1955년 신화실업에서도 경영에 손을 뗐다.

그는 철판을 판매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른 상품은 가짜가 많고 성분을 속이는 일이 많았지만, 철판은 치수만 확인하면 서로 속고 속는 일이 없고 또 유행을 타지 않는 상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엄 회장은 철판 판매업이 본격적으로 안정을 찾자 소규모 도매상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법인을 세웠다. 이 법인이 1957년 12월에 설립된 한일철강 주식회사다.

한일철강은 1963년 대한중공업(인천제철 전신) 철판대리점으로 선정됐고 공급이 안정되면서 철강 관련업체들도 늘어났다.

엄 회장은 철강사업을 하는 업체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유대관계가 필요하다고 판단, 업체를 모아 ‘한국철강상협회’라는 조합을 결성했다. 철강업계가 조합을 결성한 것은 처음으로 철강업계가 하나로 모이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회장사는 한일철강, 조합장은 엄회장이 맡았다.

ⓒ한일철강

ⓒ한일철강

▲ 포항제철 1호 판매대리점..."유통에서 강관, 형강 등 생산"

1973년 포항제철 제1기 공장이 준공되면서 처음으로 제품다운 철강재가 생산됐다. 엄 회장은 포항제철의 경인지역 판매대리점 요청을 받고 포항제철의 제1호 대리점을 열었다. 당시 철강 업계에서 쌓아온 엄 회장의 경력과 평판, 영업실적 등이 인정을 받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엄 회장은 법인형태의 큰 철강도매점을 운영하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974년 엄 회장은 단순한 철판 유통에서 벗어나 제조업을 하기로 했다.

우선 2000평 등촌동 부지에 경량 형강을 생산할 수 있는 성형기를 설치하고 건축자재로 보급시키고자 C-형강을 선택했다. 당시 국내에는 C-형강이라는 품목 자체가 없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산 C-형강이 제작된 것이다.

엄 회장은 파이프를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등촌동에서 가까운 가양동 6000평 부지에 공장을 짓는다. 강관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엄 회장은 당시 강관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전환한 기아산업의 조관기를 인수했다. 즉 한일철강의 강관 역사를 따지면 기아산업의 강관역사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조관기로 파이프를 생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국내 절단기 수준이 좋지 않아 정확하게 재단하기 어려웠고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없었다.

엄 회장은 품질을 위해 일본회사를 방문했을 때 본 절단기를 수입했다. 당시 큰 가격차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쉐어라인(Shear Line)을 국내 최초로 설치한 것이다.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겠다는 엄 회장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됐다.

강관생산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켜 자신감을 얻은 엄 회장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포항제철이 거대 제철소로서 성장할수록 원자재인 코일을 공급지에서 바로 받아 가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엄 회장은 1982년 포항시 괴동동에 3600평 규모의 코일센터를 지었다. 코일센터 건설 후 물량이 계속 증가하자 3년 후 다시 포항시 장흥동 1만3000평에 2공장을 짓게 됐다.

포항의 2개 공장도 정상적으로 본 궤도에 오르자 한일철강은 1988년 기업을 공개하고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했다. 1991년 7월 엄 회장은 둘째 아들인 엄정헌 한일철강 회장에게 대표이사직을 물려줬다.

1994년 인천공장에 들어온 조관기는 12인치 강관을 생산할 수 있는 조관기로 철강업계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기계는 오스트리아 뵈스트알피네에서 제작한 것으로 일본의 산요세키와 한국의 대현테크, 독일의 크라우트크라머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특히 모두 완전 자동화로 이뤄져 효율성과 생산 극대화를 이뤘다.

당시로선 엄청난 규모의 투자였으며 성공을 누구도 보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관업체들이 한일철강의 생산라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했다. 현재 많은 회사들이 조관기의 자동화를 이뤘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었다.

한일철강이 대한중공업 대리점일때는 한 달에 500t 정도를 담당했고 대한중공업이 인천제철이 됐을 때는 한 달에 2000t, 포항제철 대리점이 된 이후에는 한 달에 2만t을 넘고 있었다. 또 파이프 판매량은 월 1만t 이상이었다.

현재 한일철강은 인천 1곳, 포항 2곳, 평택 1곳, 당진1곳 등 총 5곳에 공장이 있다. 평택 코일센터는 22T (폭 2500m/m) Jumbo Shear Line 을 보유하고 있어, 국내 코일센터 중 최대의 설비와 가공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일철강에서 생산된 제품은 최신식 설비로 생산돼 품질이 우수할 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거점을 두고 제품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공급함으로써 고객만족을 실현하고 있다.

또한 엄회장때 부터 시작한 일본연수는 매년 20여명의 직원들을 일본의 주요 철강회사를 견학하게 함으로서, 일본의 앞선 철강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하여 한일철강 제품이 우수한 품질을 유지하게 하는데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계열사인 하이스틸은 인천에 2곳, 당진에 2곳등 총 4곳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하이스틸 당진1공장에 보유한 롤벤더 설비와 콜드익스펜더 설비는 SAW 강관의 수준을 한 단계 높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당진2공장의 SAW 소구경 특수강관은 Seamless 강관을 대체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설비로 에너지 강관 시장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산 기술로 상용화된 대형 천체망원경 1호

국산 기술로 상용화된 대형 천체망원경 1호

▲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우주를 장악하라" 송암스페이스센터 건립

엄회장이 한국철강업에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엄회장은 2007년에 경기도 양주시에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 천문테마파크인 송암스페이스센터를 세웠다.

엄회장은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아보니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서 나 자신이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엄회장은 천문대 설립 당시 80세가 넘어 천문대를 왜 건립하냐는 질문에  “먼 옛날 세계를 제패하는 자는 징기스칸의 몽골 같은 육지전에 강한 나라였다. 그 후에는 스페인, 영국 같은 해전에 능한 나라가 세계의 강국이 되었고, 현재는 하늘을 지배하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주를 장악하는 나라가 세계에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천문우주분야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경제 규모보다 많이 뒤쳐져 있는게 현실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천문우주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제대로 된 시설은 전무한 실정임을 절실히 느꼈던 엄회장은 비록 우리의 힘이 부치는 일이나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시설을 결단하여 실행한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계명산 100만m²의 땅에 건립된 송암스페이스센터는 사설천문대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연면적 1475㎡, 지하1층, 지상 3층 규모인 송암스페이스센터는 남산케이블카보다 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천문대에 도착한다.

스페이스센터 안에는 우주관련 영상 상영을 위한 플라네타리움과 우주관련 강의 및 교육을 위한 챌린저센터가 있다.

챌린저 센터는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참사 유가족들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일종의 우주 비행 시뮬레이터 교육시설이다. 관측실에는 60cm급 반사망원경과 다양한 보조 망원경 7종을 설치돼 있다.

송암스페이스센터의 반사 망원경은 한국천문연구원 한인우 박사팀과 표준과학연구원이 제작한 것으로 일제 수입에만 의존하던 대형 망원경을 개발한 순수 국산 기술로 상용화된 대형 천체망원경 1호로, 우리나라 천문기술력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송암스페이스센터에는 조국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설립했던 송암스페이스센터의 곳곳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엄춘보 명예회장의 숨결이 깃들여 있다.

한편 한일철강은 5일 신라호텔에서 한일철강 60년 약사보고, 기념영상상영, 장기근속자 시상식, 100주년을 향한 세레모니, 축하공연등 '창립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오명 前 부총리겸 과학기술부 장관, 현대제철 우유철 부회장, 대주중공업 박주봉 회장등이 축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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