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 03 | 29
12.1℃
코스피 2,746.63 0.81(0.03%)
코스닥 905.50 4.55(-0.5%)
USD$ 1348.0 -3.0
EUR€ 1452.5 -5.0
JPY¥ 890.3 -2.2
CNY¥ 185.8 -0.3
BTC 100,002,000 297,000(-0.3%)
ETH 5,066,000 25,000(-0.49%)
XRP 878 6.3(-0.71%)
BCH 824,500 43,800(5.61%)
EOS 1,575 61(4.03%)
  • 공유

  • 인쇄

  • 텍스트 축소
  • 확대
  • url
    복사

100년 기업 틀 닦은 박용곤 명예회장…"사람이 먼저다"

  • 송고 2019.03.04 12:58 | 수정 2019.03.04 15:15
  • 안광석 기자 (novushomo@ebn.co.kr)

생전 타인의견 경청 중시, '사람은 기업 자체' 신념

밑바닥부터 회장까지…남보다 앞선 도전정신 돋보여

1996년 8월 두산그룹 창업 100주년 축하 리셉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고(故) 박용곤 명예회장.ⓒ

1996년 8월 두산그룹 창업 100주년 축하 리셉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고(故) 박용곤 명예회장.ⓒ

지난 3일 타계한 박용곤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은 '조용한 리더십'과 '인재경영'으로 요약된다.

박 명예회장은 두 가지 철학적 신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과 선진경영기법 도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오늘날 100년 기업 두산그룹의 기틀을 닦는 데 큰 수훈을 세웠다.

◆남의 밥 먹는 것부터 시작…두산 첫 업무 '공장청소'

고인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1960년 4월로 두산그룹이 아닌 한국산업은행에 공채 6기로 입행했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라고 강조한 선친 박두병 초대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다.

3년 동안 은행생활을 거친 고인은 1963년 4월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이후 선진적인 경영을 잇따라 도입하며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고 한양식품과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룹회장을 맡은 이후 1985년 동아출판사·백화양조·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두산기술원·두산렌탈·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잇따라 설립했다. 1974년에는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 사장에 취임해 세계적인 통신사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국제상업회의소 한국위원회 의장과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영성과를 인정 받아 1984년 은탑산업훈장, 1987년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경청의 리더십과 인재 중심 철학

고인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었지만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자신의 뜻을 짧고 간결하게 전했다. 사업적 결단의 순간 때도 그는 실무진의 의견을 먼저 경청했고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어 방향을 정했다.

한 번 일을 맡기면 상대방을 신뢰하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했다. 두산 직원들은 고인에 대해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고 다른 이의 의견을 먼저 듣고 존중했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줬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다 보니 자연히 고인이 가장 강조한 것은 '인화'였다.

그는 "인화로 뭉쳐 개개인의 능력을 집약할 때 자기실현의 발판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또한 "인화란 공평이 전제돼야 하고, 공평이란 획일적 대우가 아닌 능력과 업적에 따라 신상필벌이 행해지는 것"이라고 읊어왔다.

1996년 5월 두산그룹 신 CI 선포식에서 새로운 심벌이 새겨진 그룹기를 흔들고 있는 박용곤 명예회장.ⓒ두산그룹

1996년 5월 두산그룹 신 CI 선포식에서 새로운 심벌이 새겨진 그룹기를 흔들고 있는 박용곤 명예회장.ⓒ두산그룹


고인이 평소 모든 사원이 일생을 걸어도 후회 없는 직장이 되도록 하겠다라는 목표를 가졌던 것도 이처럼 인재를 중시하는 성향 때문이다.

실제로 고인은 생전 "두산의 간판은 두산인들" "나야 두산에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이지만 두산인은 영원하다" "사람들이 잘나고 못나면 얼마나 차이가 있나. 노력하는 사람, 그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기업은 바로 사람이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라는 등 숱한 인재경영 발언을 내놨다.

◆새로운 시도, 부단한 혁신…글로벌 두산 기틀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 경영기법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앞서 동양맥주에 재직 중이던 1964년에는 당시 국내 기업에서는 생소하던 조사과라는 참모 조직을 신설해 회사 전반에 걸친 전략 수립 및 예산 편성, 조사 업무 등을 수행하며 현대적 경영체계를 세웠다.

두산그룹 출신 한 원로 경영인은 "고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라며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부단한 혁신을 시도해왔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의 혁신이 대표적이다. 페놀사태로 인한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이어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이같은 선제적인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대우종합기계·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키도 했다.


©(주) EB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체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시황

코스피

코스닥

환율

KOSPI 2,746.63 0.81(0.03)

코인시세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비트코인캐시

이오스

시세제공

업비트

03.29 16:38

100,002,000

▼ 297,000 (0.3%)

빗썸

03.29 16:38

99,858,000

▼ 373,000 (0.37%)

코빗

03.29 16:38

99,969,000

▼ 258,000 (0.26%)

등락률 : 24시간 기준 (단위: 원)

서울미디어홀딩스

패밀리미디어 실시간 뉴스

EBN 미래를 보는 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