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성 기자 [출처=ebn]](https://cdn.ebn.co.kr/news/photo/202509/1679822_697002_238.jpg)
산업재해보상보험이 흔들리고 있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사회안전망이라는 본래 취지와 달리, 복잡한 절차와 긴 처리 기간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들을 이중고에 빠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최근 개최한 산재보험 정책토론회는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신청 및 처리 절차의 장기화, 역학조사 지연, 획일적 보상 체계의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보상을 가로막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입증책임의 무게다. 현행 제도 하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질병이나 부상이 업무와 관련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산업재해, 특히 직업병의 경우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석면으로 인한 폐암, 야간근무로 인한 유방암 등은 수십 년에 걸친 잠복기를 거쳐 발병하기 때문에 업무 관련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역학조사의 지연이 더해진다. 근로복지공단의 조사 인력과 전문성 부족으로 인해 평균 처리 기간이 길어지면서, 당장 치료비와 생계비가 필요한 노동자들은 경제적 곤란에 빠진다.
산재보험이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제시된 해법들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수렴된다. 첫째, 선보상 제도의 도입이다. 산재 신청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조사 결과와 관계없이 우선 급여를 지급하자는 것이다.
둘째, 입증책임의 완화다. 노동자가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하는 현재의 구조를 바꿔, 일정 조건 하에서는 산재로 추정하는 원칙을 확대하자는 제안이다.
셋째, 상당 인과관계 판단에서 규범적 관점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의학적 확실성이 부족하더라도 사회적 합의에 따라 산재로 인정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히자는 취지다.
하지만 이러한 개선안들도 새로운 딜레마를 낳는다.
선보상 제도의 경우, 나중에 산재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 지급된 급여를 환수할 것인지가 쟁점이다. 환수한다면 노동자에게는 여전히 부담이고, 환수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해이나 재정 부담 증가 우려가 제기된다. 입증책임 완화 역시 산재 인정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질 경우 제도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결국 산재보험 개혁의 핵심은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노동자 보호라는 제도 본연의 목적을 살리면서도, 사회적 비용과 형평성을 고려한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단순히 기술적 개선을 넘어서는 가치 판단의 문제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2027년까지 업무상 질병 처리 기간을 120일로 단축하겠다고 밝힌 것은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제도 운영의 철학이 바뀔 때 가능하다. 산재보험이 '의심스러우면 배제'가 아니라 '의심스러우면 보호'의 원칙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사회안전망다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존재 조건이 급변하는 시대다. 플랫폼 노동, 원격근무, 정신건강 문제 등 새로운 형태의 산업재해가 등장하고 있다.
산재보험 제도 역시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진화해야 한다. 이번 토론회가 단순한 제도 개선을 넘어 노동자의 존엄과 안전을 지키는 사회적 합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