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된 연말 자본 시장, 기업 회사채 순상환 기조 뚜렷

지난해 12월 국내 회사채 시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 계엄령 선포에서 탄핵소추안 가결로 이어지는 정치 이슈에 크게 요동쳤다. 갑작스런 혼란에 금리와 환율이 튀어 올랐고, 단기 금리 위주로 상승세를 보이면서 단기성 자금 의존도가 높은 건설사들을 위협했다.
연말과 정치 리스크에 기관들이 회사채 신규 투자를 사실상 중단한 가운데 11월에 이어 12월에도 대형 건설사들의 회사채 발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2024년 시공능력평가 99위 보미건설이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의 지급 보증을 발판삼아 회사채를 발행하며 자금을 조달했다.
크레딧 시장에선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속도 조절로 금리 인하 수혜가 사라진 부동산신탁사들의 신용등급 줄 강등이 이어졌다. 12월(셋째주 기준) 회사채 발행 규모는 2조 5296억원으로 전월 같은 기간 5조 1973억원 대비 절반 가량 감소했다.
첫째주 발행 규모 9896억원(12건), 둘째주 7900억원(7건), 셋째주 6500억원(6건)으로 매주 감소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금리 인하기를 맞아 회사채 시장엔 조 단위 물량이 쏟아졌지만, 연말 북클로징에 월 초 발생한 비상계엄으로 갑작스런 탄핵정국까지 가세하면서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었다.
미국 연준 매파적 발언에 내년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 상실
금융 당국의 강력한 시장 안정화 조치로 서서히 안정세를 찾아갔지만, 이번엔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매파적 결과는 내년 금리 인하 속도 조절 가능성을 끌어내며 국채 금리에 상방 압력을 가했다.
지난 3일 밤 일어난 계엄 선포 및 해제로 금융 시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계엄 당일 환율이 1440원까지 치솟았고, 4일 주식 시장은 폭락장을 맞았으며 채권시장도 약세를 보였다. 당국이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장에 무제한 유동성 공급 조치를 시행하며 주식-채권 시장의 낙폭은 서서히 축소됐다. 하지만 비상계엄 선포가 탄핵정국으로 이어지면서 악재는 계속됐다.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추경 우려에 따른 장기금리 변동성까지 더해지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러다 18일 한국은행이 내년 1월 기준금리를 50bp 내릴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채권시장은 짧은 3년물 중심으로 다시 강세를 보였다. 여기에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25bp 인하하며 내년 금리 인하 기대감이 다시 커졌다. 하지만 이도 잠시 미국 연준이 앞으로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추겠다고 전하면서 시장은 급경색됐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뉴욕 증시에서 주요 지수가 일제히 급락했다.
당국이 급히 시장 안정화 메시지를 내놓고,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와프를 확대하는 등 변동성을 완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환율과 금리는 치솟았다. 원달러 환율은 2009년 금융위기 이후 15년 만에 1450원을 넘어섰다. 국고채 금리도 일제히 상승했다. 3년물 국고채 금리만 해도 2.5%선에서 유지돼다 19일 2.6%까지 올랐다. 2년물과 5년 물은 각각 6.4bp, 8.6bp 상승해 각각 2.702%, 2.741%에서 거래됐으며 10년물도 2.815%로 같은 기간 8.0bp 상승했다.
이러다보니 월 초 순발행기조를 보였던 기업들은 주 후반으로 갈수록 순상환 기조로 돌아섰다. 셋째주만 해도 기업들의 회사채 만기 상환 규모는 4280억원에 달했지만, 순발행 규모는 절반인 2220억원에 그쳤다. 중소형 건설사는 물론 대형 건설사들도 회사채 발행은 엄두도 못냈다. 모처럼의 금리 인하기를 맞아 연말-연초 효과까지 활용해 곳간을 채워보려 했지만, 이제는 꿈 같은 이야기가 됐다.

건설채 발행 1곳...보미건설, ‘캠코 지급보증’으로 136억 조달
12월 회사채 시장을 찾은 곳은 보미건설 단 한 곳이다. 시공능력평가 순위 99위의 보미건설은 최악의 실적에 현금 곳간이 바닥을 드러내자 회사채 시장을 찾았다. 하지만 자체 신용등급이 없고 발행 후 이자 대응이 어려워 이자율이 낮은 캠코 지급보증을 통해 회사채를 발행했다. 보미건설은 캠코의 신용등급(AAA)을 적용, 3년 만기 136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발행금리는 3.46%으로, 현재 보미건설의 은행 차입금 이자율이 최저 4% 중반에서 최고 6%대에 이르는 점을 고려하면 최대 3%p 절감 효과를 얻게 됐다. 지급보증을 선 캠코는 이번 회사채 원리금의 최대 80%의 상환을 보장한다.
자금 사정이 급한 건설사들은 웬만하면 단기시장으로 몰렸다. 하지만 급격한 정세변화는 단기 금리를 들었다 놓으면서 건설사들의 자금 조달을 더욱 버겁게 했다. 올해 10월까지만 해도 연 4% 중반 대에서 형성된 3개월 물 전기단기사채 금리는 탄핵정국이 시작된 최근 연 7%까지 뛰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투자자를 겨우 모으는 수준이다.
건설업 자체가 유동성 위기에 쉽게 노출된 업종인 만큼 정국 불안으로 ‘건설업 크레딧 이슈’가 또 다시 불거질 경우 손실이 할 수 있다는 투자자들의 기우 때문이다. 이같은 우려는 어느 새 현실이 되는 형국이다. 일부 중견 건설사들의 워크아웃 설(設)이 돌기 시작했고, 부동산신탁사들의 신용등급 줄하향도 이어지고 있다.
‘금리 수혜’ 사라진 부동산신탁사 신용등급 줄강등 본격화
나이스신용평가는 20일 코리아신탁의 장기신용등급과 전망을 'BBB+/안정적'에서 'BBB+/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한국기업평가도 전날 신한자산신탁의 기업어음(CP) 신용등급을 'A2'에서 'A2-'로 내렸다. 이들의 책준형 토지신탁 관련 신탁계정대(자체자금)를 중심으로 대규모 대손비용이 발생하면서 적자가 발생했고, 영업순이익률이 저조한 흐름을 보인 탓이다. 코리아신탁의 경우 자기자본 대비 순고정이하자산비율이 증가하면서 자산건전성도 크게 나빠졌다.
시장은 정치리스크에 미국 연준의 매파적 발언으로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까지 낮아지면서 예년과 같은 연초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두 번의 탄핵 정국 당시 신용스프레드는 2004년 축소 추세를 이어갔고, 2016년은 소폭 확대됐다가 국회 탄핵안 가결 이후 축소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일단 미국 중심 정책을 중요시하는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통상환경의 불안정성이 확대될 수 있고, 탄핵 정국 이후에도 장기불황의 늪에 빠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내년에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 외에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익스포저가 큰 금융권과 건설사처럼 유동성 위험이 있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더욱 어려워 질 것”이라며 “펀더멘탈에 이슈가 있는 기업들은 금리 스프레드가 크게 벌어져, 올해보다 더 극명하게 수요예측 결과가 갈릴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