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유통업계가 분주하게 관련 대응에 나서고 있다. 백화점, 대형마트, e커머스 등 법 시행에 앞서 온·오프라인 부문에서 재설계한 안전 관리 체계와 조직을 살펴보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조치를 소홀한 상황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최고경영자) 처벌을 핵심으로 한다. 정부가 식료품등 일반 소비재 제품까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업계는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27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대형 e커머스 기업인 쿠팡은 최근 안전관리 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해 경영진으로 꾸렸다. 지난해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 사건을 겪은 쿠팡은 재발 방지를 위해 만반의 준비에 나섰다.
우선 지난해 9월에는 국내 1호 재난안전 박사학위 취득자로 알려진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상무 출신인 유인종 부사장을 영입했다. 유 부사장은 삼성그룹에서 33년간 역임하며 안전관리자로는 처음으로 삼성 임원이 된 안전관리 전문가다.
이과 함께 쿠팡은 안전보건감사담당으로는 박대식 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경기북부지사장을 전무로 영입했다. 박 전무는 1988년 산업안전보건공단에 입사한 이후 전국의 사업 현장에서 위험 예방 업무를 30년간 담당한 안전보건 분야 전문가다. 유 부사장은 현재 배송 인프라 안전관리를 맡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외 쿠팡은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출신 이영상 부사장을 법무담당 부사장으로 발탁했다. 이 부사장은 기업 형사를 비롯해 공정거래, 환경, 안전 등 ESG에 관련된 법률에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식료품 배송기업 마켓컬리는 지난해 말 안전보건환경팀을 신설했다. 일반 소비재도 처벌 이슈에 대해서도 대응책도 검토 중이다.
신세계 온라인 통합몰 SSG닷컴은 최근 ESG담당을 새롭게 구성하고 분리돼 있던 품질관리팀과 안전관리팀 등 관련 조직을 산하에 두고 총괄하도록 했다.
롯데쇼핑은 백화점·마트·e커머스 등의 안전 부서를 대표 전담조직으로 승격시켰다. 안전 부서는 각 사업부의 중대재해 발생 위험 요인을 판단하고 이를 예방·개선하기 위한 업무 체계와 관련 규정들을 정비한다. 이밖에 안전보건 인력과 필요한 예산까지 운용한다.
신세계백화점은 본사 안전팀을 안전보건담당으로 격상시켜 임원급 조직으로 재조직했다. 안전 관련 전문 인력 보강과 내부 교육 등을 통해 중대재해 발생을 예방하는 구체적인 대응안을 마련 중이다.

현대백화점은 올해 하반기까지 안전관리자를 추가로 신규 채용해 백화점 전 점포와 아울렛 8개 점포에 투입할 계획이다. 신규 채용인원도 중대재해법 요구 기준보다 2배 이상 많은 수로 채용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마트업계도 대응책을 마련했다. 이마트는 기존에 있던 안전관리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현재 모든 매장에 안전관리자가 상시 근무 중이다. 최근에는 안전관리팀과 품질관리팀을 합쳐 임원급 안전품질담당 조직을 새로 설치했다. 홈플러스도 안전관리팀과 현장대응팀을 모아 안전보건관리본부를 대표 직속으로 배치했다.
롯데마트는 지난해 말 전국 점포, 물류센터, 신선품질혁신센터 대상으로 '안전보건경영시스템 국제 표준 ISO 45001' 인증을 취득했다. ISO 45001은 사업장 각종 위험 요인을 사전 예측 및 예방 관리해 조직 내 안전보건체계를 관리하기 위한 국제 표준 인증 제도다.
롯데 관계자는 "경영시스템이 실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지속적인 임직원 교육과 점검, 도급·용역·위탁 관련 협력업체 종사자들과 협력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통업계가 이렇게 중대재해법 시행에 대한 대응책 마련을 위해 분주히 움직인 배경엔 정부의 법령 해석이 제시되어서다. 정부는 최근 사업장 내 안전사고를 넘어 일반 소비재에서 발생한 사고도 중대재해법 처벌 대상이라는 해석을 내놓으며 해당 법이 유통업계 폭넓은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 조치 의무를 위반해 발생하는 인명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안전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고 법인에게는 50억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는 게 법의 핵심이다. 노동자가 다치거나 질병에 걸릴 경우에도 사업주가 7년 이상 징역 또는 1억원 이상 벌금에 처해진다.
유통업계가 법안 시행을 대비해 안전관리체계를 보강해왔지만 우려는 존재한다. 업계 관계자는 "중대재해법에 대비해 대응책을 분주히 수립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고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참고할 만한 가이드라인도 명확히 나오고 있지 않다"면서 "안전한 사업장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면서도 경험칙이 더욱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법 시행을 대비해 기업은 다양한 사고 케이스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해 별도로 참고할 만한 '선례'와 '기준'이 부재하다는 뜻이다.
법 위반 시 처벌이 과도하다는 불만도 나온다. 사고 상황과 해석에 따라 책임 주체가 갈리는 다변적인 기준이 보다 명확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산재 예방의 의무와 과도한 처벌을 경영자에게만 부과하고 종사자 과실로 발생한 재해도 처벌 받을 수 있어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유통업계에 긴장감이 형성됐다"면서 "당분간 시행착오가 벌어질 것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