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중소조선사 및 기자재업계에 대한 금융지원 확대 방침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자금유동성 문제로 힘든 시기를 겪었던 업계의 고민이 다소 줄어들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책적인 지원 못지않게 경기침체를 이유로 여신 축소에 나서는 시중은행들의 관행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22일 정부는 ‘조선산업 활력제고 방안’을 통해 중소조선사 및 기자재업계의 금융애로 해소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총 7000억원 규모의 신규 금융지원과 함께 1조원 규모의 만기연장을 지원하고 필요한 재원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대형조선사와 지자체, 정부의 공동출연을 통해 마련하기로 했다.
이번 방안에서 기존 중소조선사의 RG(Refund Guarantee, 선수금환급보증) 프로그램 규모는 2000억원으로 확대되고 70억원 이상의 중형선박에도 RG 보증이 가능해진다.
조선기자재업체의 경우 올해 말 임박한 1조원 규모의 대출·보증의 만기를 1년 연장함으로써 금융부담을 완화했다.
그동안 중소조선사들은 선박 수주에 필수적인 RG 발급이 막히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조선사의 법정관리나 파산의 직접적인 이유가 됐다.
SPP조선의 경우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흑자전환에 성공한 이후 선박 수주에 나섰으나 채권단으로부터 RG 발급을 거부당함으로써 수주계약에 실패했다.
지난 2015년 글로벌 선사들로부터 총 8척의 선박수주를 확정하며 RG 발급을 요청했던 SPP조선은 2017년 3월 마지막 선박을 인도할 때까지 단 한 척에 대한 RG도 발급받지 못했다.
주채권은행이던 우리은행을 비롯해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채권단은 RG 발급을 위한 협의에 들어갔으나 수익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RG 발급이 무산됐으며 이로 인해 SPP조선은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채권단의 갈등은 수출입은행이 주채권은행인 성동조선해양의 RG 발급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5년 민영화를 추진하던 우리은행이 여신 축소를 위해 성동조선 채권단의 탈퇴를 선언하며 마찰을 빚었다.
특히 성동조선을 비롯해 SPP조선 통영조선소, 가양중공업, 동성화인텍 등이 위치한 통영 안정공단의 우리은행 지점 철수는 업계의 반감을 키웠다.
업계에서는 뒤늦게나마 정책적인 지원에 나서겠다는 정부의 노력이 반갑기는 하나 실효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조선산업 활력제고 방안’에서 정부는 금융기관이 수주 적정성 평가를 통해 시장조건으로 RG 발급에 나선다고 명시했는데 그동안 은행들이 자체적인 평가를 빌미로 RG 발급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계약부터 인도까지 2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는데 2년 후 선박 시장가격과 후판을 비롯한 생산원가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고 수주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은행이 있겠나”라며 “판단기준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조선사가 판단한 수익성 기준과 비교해보고 필요한 부분에 대해 조율이라도 하겠지만 은행들은 이마저도 거부해왔다”고 설명했다.
조선산업 위기를 이유로 기자재업계의 자금줄을 압박하는 행태에 대한 개선도 시급하다.
기자재업체들은 조선사에 기자재를 먼저 납품한 후 나중에 이에 대한 대금을 받게 되는데 채권단이 조선사의 자금흐름을 통제하면서 납품한 기자재에 대한 대금을 받는 것도 힘들어졌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건비 등 당장 급한 자금마련을 위해 대출을 신청하면 은행들은 리스크를 이유로 거부하거나 기존 대출금에 대한 조기상환을 강요해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조선소에 납품한 명세서를 보여주며 대금을 받을 때까지 필요한 자금만 대출해달라고 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은행은 단 한 곳도 없었다”며 “조선사의 위기를 이유로 기자재업체의 대출한도를 줄이는 은행의 행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업체마저 위기상황으로 몰아갔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은 은행들의 이와 같은 행태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나 실효는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난 2015년 진웅섭 당시 금융감독원장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업이라도 금융기관이 경쟁적으로 여신을 회수하면 버틸 수 없다”고 강조했으나 기자재업체들의 자금유동성 위기는 더욱 높아졌으며 문을 닫는 기업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3년여가 지난 현재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다시 은행권의 협조를 당부하고 있으며 금감원은 은행들이 개별회사 신용도와 상관없이 획일적이고 무분별한 여신회수에 나서지 않도록 점검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중소기업들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정책과 은행권에 대한 감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은행권이 RG 발급 기준을 명확히 밝히고 중소조선사에 더 높은 RG 수수료를 요구하는 관행도 개선돼야 한다”며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않도록 하겠다는 금융당국의 노력이 은행권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