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감독원 내 기피부서로 통했던 분쟁조정국이 '백조'로 부상할 기회를 얻게 됐다. 분쟁조정국은 윤석헌 원장체제에서 사회적 관심이 높은 키코(KIKO)사태를 비롯해 즉시연금 문제를 맡게 됐다. 금융개혁을 주도하는 해결사로 나서는 모양새다.
24일 금감원에 따르면 윤 원장이 지난 9일 밝힌 금융감독 혁신과제에 포함된 주된 현안은 키코와 즉시연금 및 암보험 문제이다. 모두 분쟁조정국1국과 2국 소관이다. 이전까지 금감원 내에서 이른바 '3D업무' 부서로 인식됐던 분쟁조정국이 윤 원장표 금융개혁의 선두에 섰다.
키코 사태와 즉시연금 및 암보험 문제 해결사로 나서면서 분쟁조정국은 소비자 눈높이에 맞는 금융생태계 조성을 추구하는 윤 원장의 철학을 본격 실현하는 부서로 부상했다. 특히 분쟁조정1국은 즉시연금 일괄구제의 방향타를 잡고 있다.
이른바 즉시연금 사태는 '허술한 약관'이 원인으로, 금융권 큰 관심사다. 이 사태는 삼성생명 즉시연금 가입자가 약관에서 사업비 공제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연금 지급액을 줄였다는 민원을 제기한 데서 시작됐다. 분쟁조정위원회가 '약관에 문제가 있다'는 판정을 금감원이 집단분쟁을 막을 기준으로 제시하면서 해당 상품의 공통의 계약자에게 적용토록 권고했다.
문제는 즉시연금 가입자가 16만명에 달하고, 돌려줘야 할 보험금이 1조원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부담감을 느낀 보험사들은 금감원이 법제화되지 않은 '일괄 구제' 일환으로 보험금 환급을 종용한다고 맞서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반 소비자는 보험정보도 부족하고 이런 분쟁 조정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조차 모른다"면서 "같은 류의 상품 계약자들이 같은 약관으로 보험계약을 체결했는데 어떻게 이를 건건이 따로 판단하겠다는 것인지 보험사의 입장이 이해 안된다"고 설명했다.
키코(KIKO) 사태는 윤 원장이 금융행정혁신위원장 시절부터 "문제가 많다"면서 재조사를 권고해온 이슈다. 키코 사태는 분쟁조정2국에서 '제로베이스'에서 재조사하고 있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변동하면 약정한 환율에 외화를 파는 파생금융 상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 8월 신한·우리·외환·하나·씨티·SC제일·KB국민은행에서 집중적으로 팔렸다. 막대한 환차손을 입은 중소기업들이 막대한 금융 비용을 짊어지게 되면서 줄도산했다. 피해 기업이 700여곳, 피해 규모가 수조원대로 파악됐다.
당시 기업들은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은행에 손을 들어줬다. 현재 이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시도 의혹 정황과 맞물리면서 최근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다.
분쟁조정2국은 이 과정에서 불완전판매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은행검사역과의 공조로 해당 TF를 꾸린 상태로 분쟁조정을 신청한 피해기업 5곳과 늦어도 8월말까지는 조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애초 분쟁조정국은 신청인이 제기하는 금융관련 문제에 대한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신청인과 금융사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게 주업무다. 금융전문가적 시각으로 분쟁을 살펴보지만 특성상 신청인과 금융사들로부터 받는 불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금감원 설립과 함께 기피부서로 전락했다.
보험민원 감축을 천명한 최수현 전 금감원장 시절부터 높은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과로부서'로 낙인 찍힌 분쟁조정국은 통상 직원 한 사람당 일 년에 500건씩 처리하는 상황이다. 최근 법률 검토 인력이 축소돼 기존보다 인력이 줄어들었다. 현재 분쟁조정국 1국은 74명, 2국은 50명으로 이뤄졌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기피 부서로 인사발령이 나면 다른 부서로 옮길 수 있는 최소 근무기간인 2년만 잘 버텨보자는 인식이 팽배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민원 신청인들의 불만과 불신, 항의가 따르고 금융사의 협조도 이끌어내기 어려워서다. 금감원 일각에서는 분쟁조정국을 '아오지 탄광'이라고 부를 정도다. 인사발령 때면 분쟁조정 분야로 발령날까봐 두려워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분쟁조정국 관계자는 "분쟁조정국은 금감원 내에서 가장 힘든 부서로 손꼽히는 데 1인당 1년에 500건의 분쟁을 처리하는 수준"이라면서 "민원인과 금융사로부터 '고마움'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받고, 금감원 내부적으로도 중요도가 낮은 커리어를 쌓는다는 인식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소비자보호 기조 확산 속에 금융민원도 급증하고 있다. 금감원 미결 민원은 4월말 5000여건에서 5월말 6000건으로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시연금 등 보험 집단민원이 크게 늘면서 적체 현상이 심화된 것. 특히 보험 분쟁조정은 법률상 약관해석, 판례 및 외국사례 분석 등 시간과 인력이 많이 필요한 영역이다. 다른 분쟁조정파트도 녹록하지 않다.
이미 발생한 금융사고와 상품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검사 경험이 풍부한 검사역 출신자가 필요하지만 검사국의 인적 지원이 원활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금융소비자보호처 산하의 임원이 은행·중소서민부문 임원에게 검사역 지원 요청을 할 때만 그나마 지원이 이뤄지는 수준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칼을 주고 금융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야지, 하고 싶어도 문제해결 방안이 없어 답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금감원의 분쟁조정 업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분쟁조정국의 존재감이 미미하다보니 윤 원장도 두달 전 취임해서야 금감원이 분쟁조정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환경을 반영해 2015년까지 금감원은 인사발령 기피대상인 분쟁조정국, 소비자보호감독국, 자본시장조사국 직원들에게 승급, 승진 평가 때 직전 7개년의 평균에 가산점(0.1점)을 부여했다. 하지만 기피부서란 오명은 벗지 못했다. 타부서를 비롯해 노동조합 등의 반대 영향으로 가산점 제도는 2016년 폐지됐다. 특정부서만 고생하는 게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