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명료해졌다. 경영권 승계 등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주총 안건은 주주, 시장, 사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지난 26일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경영권을 박탈한 것에 대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평가다. 김 위원장은 여기에 대한항공 주총은 시장참여자와 사회의 인식을 바꾼 이정표라는 수식어도 붙였다.
국민연금의 반대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게 되면서 국민연금이 주도하고 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주 행동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경영진의 안건에 대부분 찬성표로 일관해 '주총 거수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주식 108조9000억원어치를 갖고 있으면서도 주주로서 존재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국민연금 주도로 대기업 총수의 이사직을 박탈하는 첫 사례가 나옴에 따라 앞으로는 국민연금의 영향력에 힘이 크게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례로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을 발표한 뒤 본격적인 주주권 강화에 나서면서 '저배당 기업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등 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겸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장은 "국민연금은 가진 지분대로 11.56%만큼 주주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 장관의 이 같은 생각에 정치권과 시민단체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적극 동조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경영계의 긴장감도 고조되는 듯 보인다.
이런 가운데 이번 대한항공 사례로 바로 다음날 진행된 주요 금융그룹의 주총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27일 일제히 열린 신한금융, 우리금융, IBK기업은행 주총에서 각 금융사 최고경영자들이 동일하게 강조한 것은 주가부양 외에도 포용과 사회적 책임 등이었다.
이날 조용병 회장은 대한민국 리딩 금융그룹으로서의 역할을 이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포용적 금융의 '희망사회 프로젝트'와 '혁신성장 프로젝트'를 양대 축으로 미래를 함께하는 따뜻한 금융을 실천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금융은 임시 이사회에서 지배구조 내부규범도 개정했다. 회장 후보를 선출하는 '지배구조 및 회장후보 추천위원회' 구성이 기존에는 대표이사 회장과 4인 이상 6인 이하의 사외이사였다. 이를 5인 이상 7인 이내의 사외이사로만 구성하고, 대표이사 회장은 빠지는 것으로 정했다. 연임을 노리는 현직 회장의 '셀프 추천'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신한금융 관계자는 "기존 규정 체계에서도 회장이 후보군에 포함될 경우 대표이사 회장 후보 추천 절차가 시작되는 단계에서부터 위원회 참여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됐지만, 이번 규정 개정을 통해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사전에 없애게 됐다"고 설명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비은행 부문의 확장과 더불어 금융소외계층을 위한 지속적인 지원 등을 결의했다. 손 회장은 "대한민국 금융 종가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올해도 금융소외계층과 중소기업 지원을 지속해 금융의 사회적 책임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기업은행은 사외이사 정족수를 모두 채우면서 금융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했다. 이날 기업은행은 신충식 전 농협금융 회장과 김세직 서울대학교 교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이에 따라 기업은행은 정관에서 정한 사외이사 정족수 4인이 모두 채워지게 된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이번 사외이사 선임으로 어느 때보다 전문성 있는 이사회 운영이 가능해졌다"며 "안정된 지배구조와 내실 있는 이사회 운영을 통해 중소기업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금융권은 주총장 밖에서도 국민연금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다. 신한금융, KB금융, 하나금융 등 주요 금융그룹들 모두가 국민연금을 최대 주주로 두고 있어 이번 대한항공 사례를 포함해 국민연금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 금융그룹에 대한 국민연금의 지분은 하나금융(9.68%), KB금융(9.50%), 신한금융(9.38%) 등이다. 우리금융지주의 최대주주는 예금보험공사(18.31%)로, 국민연금은 9.23%의 지분을 가진 2대 주주로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이번 대한항공 사례는 '조양호의 대표직 박탈이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최우선적인 일'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도덕적으로 경영상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특별한 케이스"라고 말하면서도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과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이 나머지 주주들 의결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도 사실이기 때문에 주요 금융그룹들의 경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도덕성이나 이미지 실추 등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여 권력 독점 등 지배구조와 관련한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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