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반도체'가 내년 혹한기를 보낼 것으로 보인다. 경기 침체와 미·중 갈등,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계엄령 이슈 등 대내외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소가 첩첩산중 쌓여가는 상황에서 반도체 수출의 역성장을 피하기 어렵단 전망에 힘이 실린다.
24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발간한 2025년 1분기 수출산업경기전망지수(EBSI)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내년 1분기 EBSI는 96.1로 전 분기보다 수출 경기가 소폭 둔화할 것으로 보인다.
EBSI는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다음 분기 수출 경기에 대한 전망을 조사 및 분석한 지표다. 100을 기준으로 이보다 높으면 다음 분기 수출 호조 전망이 우세한 것을 뜻한다. 반대로 100보다 낮으면 수출 악화 전망이 많다는 의미다.
특히 수출 효자 품목인 반도체의 ESBI 수치는 64.4로 수출이 역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범용 D램 수출 증가로 인한 경쟁 심화와 전방 산업 재고 증가 등이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EBSI는 올해 1∼4분기 103.4, 148.2, 125.2, 135.2 등으로 기준선을 크게 웃돌았지만 내년 1분기 전망치는 64.4로 주저앉았다.
다른 연구기관들도 산업 주춧돌인 반도체의 내년 수출 전망을 어둡게 보고 있다.
산업연구원이 최근 국내 주요 업종별 전문가 133명을 대상으로 서베이 지수(PSI)를 조사한 결과 내년 1월 제조업 업황 현황 PSI는 75로 12월 전망치(96)보다 21포인트(p)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반도체 업황의 내년 1월 PSI 전망치는 12월 전망치(124)보다 59p 하락한 65를 기록했다.
반도체 수출의 가장 큰 불안 요소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꼽힌다.
트럼프 재집권으로 '자국 우선주의'와 '대중국 제재' 기조가 한층 강화하면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앞서 트럼프 당선인은 모든 중국산 제품에 60%의 관세 부과를 대선 공약으로 내거는 등 더욱 강력한 대중 견제에 나설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아울러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기업 편중 지원에 더해 이른바 칩스법(반도체 및 과학법) 보조금과 관련한 새로운 거래조건을 제시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칩스법은 미국에 설립하는 반도체 밸류체인 공정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이다. 조 바이든 현 정부가 지난 2022년 제정했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에게 반도체 생산 보조금으로 총 390억달러, 연구개발(R&D) 지원금으로 총 132억달러 등 5년간 총 527억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미국 인텔과 마이크론을 비롯해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지원 명단에 올랐다.
다만 트럼프 재집권으로 국내 기업들에게 기존 투자액 대비 보조금 규모를 낮춘다거나, 기존 보조금 대비 투자 확대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허슬비 무역협회 연구원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통상 환경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면서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지는 만큼, 우리 수출 기업들은 각국의 통상 정책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원자재 수급 관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이미지 [출처=픽사베이]](https://cdn.ebn.co.kr/news/photo/202412/1646789_658836_55.jpg)
■삼성·하이닉스 실적 전망치 ↓…HBM, 수익성 방어 관건
국내 반도체 산업의 양대산맥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전망치도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은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범용 메모리 칩 가격 하락으로 실적 회복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화투자증권은 삼성전자 반도체의 내년 예상 영업이익을 기존 25조6000억원에서 16조7000억원으로 하향조정했다. 한화투자증권은 "내년 수요에 변화가 없다면 D램은 3분기, 낸드는 1분기부터 가격 하락 압력이 커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분석했다.
앞서 키움증권도 내년 삼성전자 DS부문의 영업이익을 기존 전망치보다 낮은 19조2000억원으로 낮춰 잡았다.
결국 AI 반도체 큰 손인 엔비디아에게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언제 공급하느냐에 따라 한 해 실적이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삼성전자 HBM3E 8단과 12단 제품의 경우 엔비디아의 퀄(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상황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선점을 토대로 수익성 방어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53%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다. 2위 삼성전자(38%) 대비 25%p 앞서며 시장 선두를 공고히 하고 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5세대 HBM3E 12단 제품을 사실상 전량 엔비디아에 공급 중으로, 내년 상반기에는 HBM3E 16단을 공급할 예정이다. 하반기에는 HBM4 12단 출시도 예정됐다.
HBM 시장에서의 높은 존재감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삼성전자 대비 실적 하락세는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화투자증권은 SK하이닉스의 내년 예상 영업이익을 기존 31조7000억원에서 29조1000억원으로 소폭 내리는 데 그쳤다.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및 SK하이닉스 이천 공장 [출처=각 사]](https://cdn.ebn.co.kr/news/photo/202412/1646789_658835_341.jpeg)
■ HBM 밀리면 끝…경쟁력 향상·사업 확장 사활
AI 열풍에 힘입어 내년 글로벌 HBM 시장 규모가 올해 대비 156% 급등한 467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HBM 경쟁력 향상과 사업 확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승부수는 추격자 위치에 선 삼성전자가 먼저 띄웠다. 지난 5월 이례적으로 DS부문장을 교체하고 구원투수로 전영현 부회장을 등판시켰다. HBM 개발팀을 부활시키고 D램 설계 전문가인 손영수 부사장을 책임자로 발탁했다. 오는 2026년부터는 7세대인 'HBM4E'를 양산하고, 2027년에는 자율주행 차량용 HBM4E도 선보인다는 목표다.
SK하이닉스는 HBM 매출 비중을 올 4분기 전체 매출의 40% 수준까지 확대하겠단 목표를 삼았다. 이를 위해 HBM, D램 등 주요 제품 부문에서 성과를 낸 인물들을 신규 임원으로 다수 선임했다.
한편 일각에선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향 HBM 독점 공급을 토대로 내년에도 HBM 시장에서 선두적 지위를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최신 HBM에서 기술적으로 우위 역량을 차지한 만큼 인공지능(AI) 수요 확대에 따른 수혜를 입게 될 거란 이유에서다.
디올투자증권은 "(SK하이닉스가) HBM4에서 후발주자들과 기술 격차를 유지하며 내년에도 AI 수요 확대에 따른 메모리 수혜 대표주자로서의 프리미엄이 주목받을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한화투자증권은 "HBM 시장의 선두 포지션은 단기간 내 변화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내년 12단 시장도 사실상 독점하며 SK하이닉스가 가격 프리미엄을 홀로 향유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