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출처=삼성전자]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출처=삼성전자]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봐라."

삼성전자를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다고 평가받는 이건희 선대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오는 7일로 32주년을 맞는다. 

1993년 이 선대회장은 위기 상황에 빠진 삼성의 체질 개선을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등지에서 임직원들과 만나 '신경영'을 선언했다.

독일 출장 당시 임직원들에게 일하는 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봐라"고 말한 게 이 선언의 핵심이다. 이 발언은 삼성의 전사적 혁신을 촉발시켰다. 

이 선대회장은 또 임원들을 불러 모아 "국제화 시대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 2.5류가 된다"며 1류로 살아남을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선언은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 선두 기업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변화는 휴대폰 사업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삼성전자는 1988년 국내 기업 중 최초로 휴대폰을 내놨다. 

하지만 당시 삼성은 '질(質)'보다 '양(量)'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경영진은 전년 대비 얼마나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했는지, 오직 양적 성과에만 주목했다. 당시 글로벌 1위 기업인 모토로라를 따라잡기 위해 생산량 확대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불량률은 11.8%에 달했고, 자연스럽게 고객들의 불만도 급증했다.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전량 폐기하는 모습. [출처=삼성전자]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전량 폐기하는 모습. [출처=삼성전자]

이에 이 선대회장은 1995년 3월 9일 시중에 나간 휴대폰을 모두 회수해 공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우라고 지시한다.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이다. 

삼성전자 직원들은 '품질 확보'라는 머리띠를 두른 채 망치로 휴대폰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당시 알려진 불에 탄 기기는 총 15만 대. 가치로 환산하면 500억 원으로 회사 전체 이익의 5%에 달하는 금액이다. 삼성은 이를 혁신의 계기로 삼아 이듬해인 1996년 휴대폰 개발을 기존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고 1999년 세계 최초 TV폰, 2006년 1000만 화소 카메라폰을 잇달아 내놓았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삼성전자의 또 다른 변곡점으로 작용한 셈이다. 실제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질' 위주의 경영을 정착시키고 불량을 없애기 위해 '라인스톱제(불량이 발생하는 즉시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고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하는 제도)' 등 의 혁신적 조치들을 취하기도 했다.

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사활을 건 '도쿄 선언'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D램을 차세대 핵심으로 지목하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결과는 6개월 만의 64Kb D램 개발에 성공한다. 이후 1992년 64Mb, 1994년 256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삼성 반도체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이렇듯 삼성가(家) 오너는 그룹 운명을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시기마다 결정적 메시지를 내놓고 경영 쇄신에 나서며 조직을 전면 재정비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왔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2011년 7월 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2011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관해 제품 설명을 듣고 있다. [출처=삼성]
이건희 선대회장이 2011년 7월 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2011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관해 제품 설명을 듣고 있다. [출처=삼성]

이 같은 기조는 이재용 회장 체제에서도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 최근 이 회장이 전 계열사 임원들에게 '사즉생(死則生)' 각오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 주문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반도체, 모바일, 디스플레이, 가전, 배터리 등 계열사 주요 사업 전반이 위기에 처한 가운데 나왔기 때문이다. 

과거 이 창업회장·이 선대회장이 중대한 고비마다 직접 메시지를 던지며 체질 변화를 이끌었듯, 이 회장 역시 '결정적 시기'마다 조직의 방향타를 직접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재계에선 프랑크푸르트 선언 32주년을 맞은 지금이 삼성에게 또 한 번의 '신경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믿었던 반도체는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AI 수요로 폭증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선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특히 HBM 납품 차질과 파운드리 가동률 하락은 실적 전반을 흔들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은 모바일 수요 둔화와 고객사 재고조정 여파로 주문이 급감했고, 이에 따라 생산라인 가동률은 지속 하락 중이다. 실제로 일부 고객사들은 대만 TSMC와의 거래를 확대하고 있어 삼성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여기에 반도체에 이어 스마트폰까지 미국 트럼프 행정부발(發) 관세 압박이라는 녹록지 않은 경영 환경도 부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미국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이 해외에서 생산될 경우 최소 25% 관세를 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이달 중 주요 경영진과 해외법인장 등이 참석하는 글로벌 전략회의를 연다. 회의에선 사업 부문과 지역별 현안을 공유하며 하반기 경영전략을 수립할 예정이다.

경영전략 회의에선 반전을 꾀하고 있는 HBM과 7월 출시가 예정돼 있는 폴더블폰 신제품에 관한 전략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또 독일 공조업체 플랙트그룹을 15억유로(한화 약 2조40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한 만큼, 공조사업 확대 전략도 주요 안건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금 삼성의 위기는 외환위기 전후와 맞먹는 수준으로 보여진다"며 "과거 프랑크푸르트 선언처럼 삼성의 체질을 다시 바꿔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이재용 회장이 어떤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할지 재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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