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생성 이미지. [출처=오픈AI]
챗GPT 생성 이미지. [출처=오픈AI]

국내 상장사들이 자사주를 '보유'또는 '매입'에서 '소각'으로 방향을 급격히 바꾸기 시작했다. 단기 주가 방어나 경영권 수단으로 활용되던 자사주가 이제는 구조 개선과 시장 평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14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국내 상장사들이 자사주를 매입한 뒤 보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과감히 소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 한 해 자사주 매입액은 17조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찍었고, 이 중 68%인 11조원이 소각됐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30%대였던 소각 비중이 두 배 가까이 뛴 것이다. 올해는 그 흐름이 더 가팔라졌다. 상장사들의 자사주 매입액은 10조원이지만 소각액은 13조원으로 되레 앞질렀다. 자사주 활용에 있어 뚜렷한 ‘전략 전환’ 흐름이 관측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 안팎에선 이 같은 변화의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기업의 잉여현금흐름(FCF), 다른 하나는 정책의 방향성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잉여현금(FCF)을 확보한 기업 입장에선 단순 보유보다 소각을 통해 주식 수를 줄이는 방식이 주당이익(EPS)을 높이고, PER·PBR 같은 밸류에이션 지표 개선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기업들이 자사주를 ‘쥐고 있는 자산’에서 ‘줄임으로써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이유다.

정책도 기업의 전략을 압박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자사주를 취득한 경우 1년 내 소각을 원칙으로 하며, 기존 보유분에 대해서도 유예기간을 두고 정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발행주식의 10% 이내로 자사주 보유를 제한하고 교환사채(EB) 발행 등 특정 활용 방식에 대한 규제안도 병행 추진 중이다.

결국 정책 유인과 재무 여건이 맞아떨어지는 기업들부터 실질적인 자사주 소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소각은 단순히 주주친화 명분을 넘어 지표를 바꾸는 전략적 도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사주를 줄이면 총 발행주식 수가 감소해 주당이익이 높아지고, 이는 곧 PER·PBR 같은 시장 평가 지표를 끌어올릴 수 있다. 특히 외국인이나 기관투자자들이 이를 가치 재평가의 신호로 받아들일 경우, 주가에 미치는 효과는 더 클 수 있다.

자사주 소각, 구조적 조건이 가늠자

하나증권은 자사주 소각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요건으로 △잉여현금 여력 △낮은 배당성향의 증가 추세 △낮은 자본효율성(ROE) △낮은 최대주주 지분율과 높은 자사주 보유율 등을 꼽았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낮고 자사주 보유 비율이 높을 경우 단순 매입이 아닌 소각을 선택할 유인이 크다고도 설명했다.

이 같은 기준에 따라 자사주 소각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은 종목으로는 ‘NAVER’가 유력하게 지목된다. NAVER의 올해 예상 잉여현금 비율이 17.4%로, 풍부한 잉여현금이 확보된 상태다. 배당성향도 2023년 2.2%에서 2024년 13.2%로 가파르게 증가하며 주주환원 의지를 드러냈다. 반면 ROE는 2024년 기준 5.2%로 낮아 자본효율성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주주환원 수단으로 소각이 유력해지는 배경은 지배구조에서도 확인된다. NAVER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9.2%로 낮은 반면, 자사주 보유율은 5.8% 수준이다. 이는 자사주를 활용한 배당 확대보다 소각의 인센티브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구조로 해석된다.

LS 역시 자사주 보유율이 13.9%에 달하며 주주들 사이에서 소각 요구가 커지고 있다. 2024년 ROE는 5.1%로 낮은 편이고 현금흐름 여력도 확보돼 있어 일정 비율의 자사주 소각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평가다.

반면 셀트리온은 ROE와 FCF는 양호하나 자사주 비중이 4.8%로 낮고, 삼성전자는 자사주 비율(0.8%) 자체가 미미해 소각보단 매입이 우세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해외 사례는 자사주 전략의 실효성을 방증한다. 일본은 2022년 도쿄증권거래소가 PBR 1배 미만 기업을 압박하면서 상사기업을 중심으로 자사주 매입이 급증했고, ROE는 3%에서 5%대로 상승, PBR도 1배 이상 회복됐다. 같은 기간 시가총액은 2배 이상 뛴 115%를 기록했다.

국내는 반대로 갔다. 2010년 이후 코스피 시가총액은 207% 늘었지만 지수는 98% 상승에 그쳤다. 발행주식 수가 106%나 늘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미국 S&P500은 발행주식이 4% 줄고도 지수는 485% 급등했다. ‘나눌 주식 수’를 줄이는 것이 기업가치 상승의 핵심임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제 자사주 소각은 단순한 주주친화 제스처를 넘어 구조적인 지표 개선 수단이자 기업 스스로 시장 평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 되고 있다”며 “정책과 자본구조, 잉여현금이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기업을 중심으로 자사주 전략이 본격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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