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가 시작된 한남3구역 [출처=이승연 기자 ]
철거가 시작된 한남3구역 [출처=이승연 기자 ]

1950~60년대 판자촌으로 형성된 서울 한남3구역. 오랫동안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얼마 남지 않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하나였다. 비탈진 언덕 위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 벽에 기대어 놓인 빨래건조대까지. 이곳은 아직도 과거 서울의 정취를 품고 있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지형 덕분에 야경은 아름다웠지만, 낡고 비좁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선 환경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이런 이유로 재개발이 오랫동안 추진돼 왔고, 결국 철거가 본격화되면서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한남3구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출처=이승연 기자 ]
[출처=이승연 기자 ]

철거가 시작된 날, 달동네의 마지막 흔적을 담기 위해 한남3구역을 찾았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온기가 깃든 곳이지만, 어느새 적막만이 맴돌았다. 깨진 창문과 테이프로 덧댄 유리창, 녹슨 대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신발 한 켤레는 떠난 이들의 흔적을 말없이 대변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비닐 조각과 녹슨 간판, 벽에 남아 있는 낡은 메모지들이 대낮임에도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봇대 밑에 앉아있던  길고양이 두 마리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철거가 진행되면 이제 이 작은 생명체들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  

[출처= 이승연 기자]
[출처= 이승연 기자]

한남3구역은 4년 간의 공사를 거쳐 오는 2029년, 지하 7층~지상 22층, 총 5988가구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로 탈바꿈한다.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은 '디에이치 한남'이라는 이름의 고급 주거 단지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 한강 조망권을 품은 최적의 입지, 프리미엄 브랜드, 그리고 대규모 커뮤니티 시설까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남3구역은 재탄생된다.  

디에이치한남[출처=현대건설 ]
디에이치한남[출처=현대건설 ]

하지만 대부분의 재개발 현장이 그렇듯, 한남3구역 역시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고 있다.  특히 현대건설이 제시했던 ‘현대백화점 입점’ 공약을 둘러싸고 조합원들의 반발이 거세다. 자칫 소송까지 갈 태세다.

현대건설은 시공사 선정 당시 ‘현대백화점 등 입점 제휴’를 강조하며 조합원들의 표심을 얻었다. GS건설과 DL이앤씨가 경쟁을 벌이던 상황에서 현대건설이 ‘백화점 입점’이라는 카드를 내밀었고, 분위기는 현대건설로 급격히 기울었다.  

하지만 시공사로 선정된 이후 현대건설 태도가 달라졌다. 기존에 약속했던 현대백화점이 아닌 현대백화점 계열 유통 브랜드와 제휴해 상업시설을 운영하겠다는 입장으로 바꿨다. 현대건설은 부지 제약과 교통영향평가 등의 이유로 백화점 입점이 어렵다는 주장이다. 대신 조합원들에게 '백화점 모델을 적용한 스트리트형 상가' 조성을 대안으로 내놨다. 스트리트형 상가는 전통적인 고층 박스형 상가와 달리, 대로변에 저층으로 점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길을 따라 쇼핑, 문화, 오락, 엔터테인먼트, 식음료 시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구조다.  

조합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스트리트형 상가는 현대건설이 아니더라도 GS건설과 DL이앤씨도 충분히 지을 수 있었던 데다, 백화점과 스트리트형 상가는 아파트의 미래 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약속을 어긴 '괘씸죄'가 더 큰 듯 하다. 조합원 A씨는 “현대건설이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백화점 입점을 내세워 표를 얻어놓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명백한 기만행위”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 B씨 역시 “현대건설은 준주거지역이나 상업지구에 들어서야 할 백화점이 디에이치한남 단지 안에는 가능한 것 처럼 홍보했다"며 "이같은 소문이 외부로 퍼지면서 다른 지역 주미들도 한남3구에 백화점 입점 여부가 확실하냐면서 매수 문의 전화가 자주 왔다"고 말했다. 

한남3구역 위치도[출처=서울시 ]
한남3구역 위치도[출처=서울시 ]

건설업계는 현대건설이 한남3구역 내 백화점 입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을 확률은 낮다고 보고 있다. 현행법상 아파트 단지 내 백화점 건립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한남3구역은 한남뉴타운 내에서도 가장 넓은 지역 중 하나로, 규모 면에서 백화점이 들어설 여지가 있었다. 한남뉴타운 완공 이후 증가할 유동인구를 고려할 때 충분히 검토할 만한 요소였다는 분석이다.  

다만, 백화점 입점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건축법, 교통영향평가 등 각종 인허가 절차를 충족해야 한다. 또 주거지역 내에 들어설 경우 건폐율·용적률 제한으로 인해 규모가 축소될 여지카 크다. 설령 백화점이 입점하더라도 기존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는 건 불가능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건설이 백화점에 준하는 스트레이트형 상가를 제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첫 삽도 뜨기 전에 불거진 이 갈등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백화점 입점이 최종 무산되면 조합은 계약 조건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소송을 통해 시공사 변경을 추진할 수도 있다. 물론 조합원들 사이에선 공사 지연에 따른 추가 분담금을 우려해 현실적인 대안을 찾자는 목소리도 일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건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가 이미 크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조합원들의 믿음을 되찾기 위한 현대건설의 노력이 없다면, 이 풀리지 않은 갈등은 한남3구역의 거대한 변화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게 된다. 

재개발은 단순히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주거지를 짓는 과정만이 아니다. 오랜 시간 그곳에서 쌓아온 삶의 흔적이 사라지고, 새로운 가치가 자리 잡는 변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발전이 아닌 갈등의 그림자 뿐이다. 

철거가 진행 중인 한남3구역.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다는 기대감도 잠시, 재개발을 둘러싼 논란은 곳곳에 쌓인 잔해들처럼 쉽게 정리되지 않은 채 흩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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