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임금(賃金)’이라고 불리는 노동의 대가(代價)는 명확하고도 철저하다. 노동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적정한 대가를 지급하지 아니하는 것은 사회악(?)으로까지 분류될 수 있다.
임금은 그 수단을 근로자들이 전유하고 있다고 보이므로, 나름 사용자와 동등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자본 등의 대체재가 있고 노동시장은 종종 유동적이거나 변화할 여지도 존재하는 만큼 노동 재화를 가진 근로자는 생각 만큼(?) 대등하지 못하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임금은 근로자의 생계와도 직결되는 것이고 근로자의 생존에도 불가결한 수단이므로 보호가치가 크다고 본다. 고로 우리 노동법체계(개별적 근로관계법)에서는 임금의 보장을 무척이나 중시하고 그에 반대되는 행위를 근절하고자 한다. 널리 알려진 임금의 4대 원칙이라고 하는 것을 보자면, 통화(돈)로 지급하고 직접 지급해야 하며 전액 지급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지급해야 한다. 실로 우리 사회에서 임금은 보호되고 보장받는다.
법리적으로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근로’, ‘노동’하는 모든 존재는 근로자라고 불리는데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 사업장에서 노동(노무)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 임금은 “근로자에게 근로의 대가로 지급하는 모든 금품”이라고 한다. 이는 어쩌면 상당한 순환논리다. 질문이 답이 되고, 다시 답이 질문이 되는 형국이다. 근로자가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은 근로자가 근로를 제공한 대가로 주는(주어야 하는) 금품이라니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임금과 관련한 법리는 판례에서 유독 많이 발전하였다. 그만큼 노사간에 분쟁도 많았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간 우리 대법원에서는 근로자의 개념 정의에서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실질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라면서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였는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더 나아가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지”까지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한 요건들이 맞는다면, 근로자와 임금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과 관련한 질문이 등장한다. 대법원 판례가 말하는 ‘대상(對償)’적 성격이 과연 어떤 것인가. 간단히 보면, 근로하면 주는 보상이다. ‘근로’와 ‘대가’가 서로 마주 보고 있고 그 지급은 (과히) 의무적이다. 이 의미는 근로자가 근로를 제공하면 그에 따라서, 그에 대응해서 주어야 하는 정언(定言)적인 명제다.
그런데 특히 놀랍게도, 이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마주하는 교환가치와는 다르다. 서비스가 나쁘거나 음식이 맛없으면 감가·상각·상쇄되는 경우가 아니며 종종 대가로서의 ‘상당한 값어치(교환하는 등가의 이익)’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근로자의) 근로가 어떠한 사회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했는지, 어떠한 후생이나 복리를 제공하는데 기여했는지를 논하지 않고, 그 정도나 수치도 일일이 계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용된 제빵사가 빵을 만들었지만 맛이 없거나 그 케잌이 다 팔리지 않더라도, 그 제빵사는 정해진(약속된) 대가를 받게 된다. 아니 받게 되어야 한다(받도록 해 준다). 종종 사장은 “제빵사가 실력이 없어서 빵이 맛이 없다. 케잌이 훌륭하지 않아서 다 팔리지도 않았다”라고 불평하지만, 제빵사는 “제 근로(노동)에 대해서는 임금을 주십시오”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그게 우리 대한민국의 노동법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사업주가 바라보는 ‘근로의 대가(임금)’과 근로자가 바라보는 ‘근로의 대가(임금)’가 서로 다르기에 이런 시각차는 현실에서 상당한 문제를 가져온다. 특히 프리랜서의 성격을 가진 근로자 군(群·Group)에서는 이런 갈등 소지가 여전한데 노동 분쟁 해결기관(노동청·검찰·법원)에서는 “임금을 주어야 한다”라는 판단만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사업주는 상당한 갑甲의 위치에 있고 (필요시) 인사재량권을 통하여 교육훈련, 직무감독, 징계권을 행사하여 처우하여야 하는 것이지, 본태적으로 생래적으로 의무적으로 발생하는 대가(임금)를 미지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셈이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노동행정기관과 법원은 임금의 ‘체불’에 있어서 행정적, 형사적인 제재를 강도 높게 가하는데 “임금의 부지급, 미지급”이라는 것 외에도 “임금의 지연지급, 고의 없는 부지급”까지도 엄정한 제재를 가한다. 최근 판례를 보면 통상적인 임금은 모든 수당이 덧붙여져 이미 (가공적인) 평균임금의 범주를 뛰어넘은 상태이고 임금 관련 분쟁들은 노동청, 검찰청, 법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은 지 오래다.
어쩌면 근로자=약자, 근로자=보호대상이라는 부성애, 모성애적인 법체계는 (한쪽에) 상당히 가혹한 편면적 강행법규를 만들었고, 더 나아가 근로자 범위를 넓히거나 임금 범위를 확장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임금과 관련한 불편한 의문들을 해소할 시점이 되었다. 임금을 다시 들여다볼 때도 되었다.
근로자도 동등한 인격체이며 우리사회의 동등한 계약주체이다. 노동과 관련한 법원 판례의 법리가 나날이 새로워지는 동안 실제로 그 기반이 되어야 할 노동이론과 헌법-노동법의 법체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지 못한 시차(lag)가 생긴 것으로도 보인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정치제도와 사회적 시장경제질서가 융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헌법적 체계에서 현 21세기의 노동문화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노동관이 발현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근로자성에 관하여도 근로자성을 새로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필요하고, 임금에 관하여도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유재원, <근로자신론>, 법률신문, 2022.2.21.자).
202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2020다247190)의 법리대로 임금에 여러 정기적인 상여나 후생이 모두 포함된다고 한다면, 미래적으로 볼 때 임금이 ‘단지’ ‘근로하는’ 것에 대하여 그 반대편(상대)에서 무조건 (전액) 지급하여야 하는 것이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첫째, 과거 있었던 임금이원론에서도 임금은 생계적 부분과 보상적 부분이 있다고 하였지만(1994년 이전 대법원 판례 ‘생활보장적 임금’개념), 이러한 이론에 따르더라도 임금의 대상성은 자연히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근로만 하게 되면 당연히 그 대가를 전액 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현재의 임금일원론에 따른다고 한다면 더더욱이나 근로에 대하여만 근로의 외형에 대하여 보상을 해준다는 것이 맞지 아니한다.
둘째, 미국식의 팁(Tip)문화에서 보자. 흔히 미국식 팁문화를 비난하지만 이 제도는 엄청나게 합리적이다. 이러한 Tip제도는 실용적인 임금관을 가진다. 가치없는 노동에 대하여는, 가짜노동에 대하여는, 공허노동에 대하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발생하지 않는다. 어쩌면 철저히 노동의 실사용자(수혜자)에 대한 응익적 부담인데, 결과적으로 이 경우에도 근로를 제공한 것만을 가지고 당연히 Tip의 급부를 대상적으로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
예를 들어 보자. ‘월급루팡’이라는 것이 있다. 최근 MZ세대가 우리 사회에 정면으로 물어보는 질문들의 하나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논란되는, 장기근속자와 신입직원 간의 계층화 문제까지도 초래하고 있다. 신입직원들은 장기근속하는 관리자급 근로자가 불로소득을 노린다고 오해한다.
물론 관리자급 근로자, 장기근속근로자의 연공年功이 소홀하게 취급될 수는 없지만, 현재 그들이 누리는 급여와 후생이 과연 근로에 따른 성과(잉여)에 맞게 책정되고 있는가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평가의 진폭, 성과급의 고저는 점점 낮아지고, 실제로 늘 하던데로 계속 (초)고연봉의 관리자의 업무부담이 줄어드는 경우도 발생한다면, 21세기 신노동계급(MZ)은 합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것을 단순히 근로의 ‘대상성’이라고 정당화할 것인가. 월급루팡이 기업에 있고, 근로자들은 계층이 나뉘어서 다툰다면, 그것은 과연 노동의 미래에 부합하는 것인가.
2025년 현재, 300명 이상 사업체, 흔히 말하는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1인 임금총액은 7000만원을 돌파했다. 실제로 고연차일수록 그 평균치를 당연히 훨씬 뛰어 넘는다. 이제 더 이상 시장경제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사용자로서는 장기근속자, 상위직급자에게만 보상을 강화할 수는 없다.
자. 이쯤 되면 임금에 관한 논리가 더욱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성장하고 있으며 단순히 (장기근속과 직급을 바탕으로 하여) 시간과 양으로 승부하는 근로만이 우대받을 수는 없다.
이제 임금, 그것은 엄중한 정언명제로서만 존재할 것이 아니라, 응당의 후생을 더 많이 창조한 근로자에 대하여 후하게 지급하는 가언(假定)명제가 될 필요가 있다. 임금은 근로의 대가이니까, 근로가 있었으면 당연히 줘야 하니까. 단순히 근로자이니까, 근로를 하기는 했으니까. 이러한 사유들로 ‘마땅히’ 지급한다는 논리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법조와 학계의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미래의 노동에서는 실제로 산출되거나 책정되는 사회적인 복리, 후생의 가치에 마땅한, 상응하는 대가를 임금으로 산출하여 대우하는, 임금의 신사고(新論)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자유민주정체, 사회적시장경제질서에 부합하는 노동이론이라고 하겠다. 사회와 근로자가 공히 그 노동의 (후생적·복리적·생산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사회는 근로자의 노동에 세세히 적절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라야, 모두가 건강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