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사랑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노래 제목 중에 가장 많이 들어간 단어는 “사랑”이다.
“사랑이야, 사랑할수록, 사랑합니다, 사랑할래요, 사랑했나봐, 사랑하오,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인걸, 사랑사랑, 영원한 사랑, 첫사랑, 긴 사랑, 외사랑, 짝사랑, 미친 사랑, 아픈 사랑, 사랑이 고프다, 사랑비, 사랑눈….” 종이가 부족할 정도다. 물론 가사에는 무궁무진 더 많다.
결국(?) 한국인은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사랑을 타령하고 있다. 사랑에서 해방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사랑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를 이상하다고 비난할 수 있다. 사랑의 구속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명제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종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의 노예이거나 사랑에 속박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능동적인 사랑의 주체이며 사랑의 전파자이고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은 삶과 무척이나 가까이 있고, 결국 사람이 그 생명을 유지하는 한 삶은 지속되며 사랑을 계속 꿈꾸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도, 사람은 삶을 사는 동안 노동을 한다. 삶이 없는 노동은 있을 수 없고, 노동 없는 삶도 있을 수 없다. 특권계급이나 신분이나 유산·자산만으로 오롯이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온 세계 현대사회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 온누리에서는 누구나 일하고 그 일터에서 주체적인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노동을 해방해야 한다고 하면, 그 발언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도 종종 있다! 노동해방의 주장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터나 농토에서 일할 수 없게 되는 상황도 있을 거다. 그렇기에 농토와 회사, 자본 등등을 누군가가 지배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근로자가 일터에서 해고되거나, 농민에게서 농토를 빼앗는 것은 그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해도 과연 그럼직하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털벙거지 모자를 쓴 변호사 레닌은 감히(?) “노동의 (영원한) 해방”을 운운했다. 그는 노동자·농민이 자본가와 지주에 예속(노예처럼 종속)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혁명 직후인 1920년 “노동자가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영원히 구원받는(해방되는) 방법”을 일장 연설한다.
그는 전직 변호사였지만 그의 말에는 법률과 원칙 등등은 없었다. 그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진정 화가 나 있었고, 그의 말은 폭발력을 가졌다. 그는 지주와 자본가들이 노동자·농민 등 우리를 속인다고 했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자기들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지주들은 ‘우리가 없다면 일자리도 없고 모든 것이 없고 나라도 없다. 결국 우리가 쫓겨나더라도 그 혼돈이 우리를 다시 데려올 것이다’라고 속입니다. 더 이상 이들의 말은 우리를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단결시키고 거대한 노동의 붉은 군대를 건설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노동자, 농민)는 지주 없이, 자본가 없이,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증명할 것입니다…. 결국 노동의 원칙, 일에 대한 열정, 자기희생의 의지, 노동자·농민의 긴밀한 연맹이 노동자들을 지주와 자본가의 억압으로부터 영원히 구할 것입니다”
시대를 잘 맞춰 혁명기에 성장한 사람답다. 희대의 명연설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공허하다. 이러한 논리구조는 결국 ‘사람·노동’의 불가분적 관계, 그 운명적인 결합, 노동의 자유 또는 노동의 권리를 모두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는 비논리이자 비합리다. 노동과 자본을 두 쪽 내는 이런 논리에 기초하여, 한쪽을 비난하거나 제재하고 한쪽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선거(1인 1표)에 따른 대중민주주의에서 다수들의 콘크리트 지지를 끌어낼지언정 결과적으로 미래적이거나 또는 근원적인 성찰을 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들은 달콤하다. 내가 해고된 것은 ‘사회의 문제다.’, 내가 땅에서 농사짓지 못하는 것은 ‘지주들의 훼방이다.’, 회사와 일이 나를 속박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자본가의 악랄한 착취 때문이다.’이러한 논리들은 여전히 노동계의 유령(?)처럼 자본가·노동자, 지주·농민, 상위 지배계급·하위노동자 계층 등등으로 세상을 갈라놓는다.
누군가는 억압하고 독점하며 월권하고 남용하면서 대다수의 사람을 지배한다고 한다. 결국 소수 또는 半자본가, 半경영주에 대한 근로자 우중(愚衆)의 거센 반발로까지 확대되고, 그러한 선동과 모략으로 누군가는 정치를 하거나 대표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
하지만 이런 논리들은 우리 곁에서 묵묵히 일하는 500만명 상당의 자영 근로자, 프리랜서, 전문직 근로자, 지식 근로계층에 대해서는 전혀 그 설득력이 없거나 해명이 빈약하다. 심지어 그들에 대한 근로조건-근로시간-임금-산업재해 등 보호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대하여도 명확한 기준을 갖추지 못한 채로, 공허한 혐오의 공회전만을 돌리고 있다.
‘노동이 해방되어야 한다’라는 발언은 100년 전에 붉은 군대가 왕정과 귀족, 지주, 군벌을 몰아낼 때 일응 가능할 수 있었다. 도시 노동자와 도시 이주 농민은 무척 가난했고 괴로울 때였다. 정권은 그들을 폭제로 억압하기도 했고 결국 쏘비에뜨 연맹(노동자·농민·혁명군. 낫과 망치 그리고 별)이 결성되어 일응 해방사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실험 실패로 80여 년간의 고립과 가난이 있었고 지금은 그 무엇도 아니게 되어버린 수정자본주의 시민으로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려 그들은 해방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노동자·농민·붉은 군대가 자본가·지주의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구원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레닌의 말은 일부분 맞다. 그가 그의 연설에서 언급한 “노동의 원칙, 일에 대한 열정, 자기희생의 의지” 등등은 오히려 노동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의 존중이라야 맞는다. 이는 진정 노동이 능동적으로 자생하여 그 근력(筋力)을 키워서 당당하게 노동자가 자신의 근로를 대우받고자 하는 요구로 해석된다.
사람이 날마다 사랑을 타령하면서 살 듯이, 사람은 자유로이 노동하고 노동의 이상을 꿈꾼다. 노동을 예찬하기도 하고 노동으로부터 잠시 쉬기도 한다. 노동의 시간 속에서도 노동요, 노동주를 함께 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동의 적정한 대가를 받고는 자신과 삶에 여유까지도 준다.
대한민국의 근로자들은 거지가 아니고 허약한 병자가 아니다. 이제껏 근로자들은 배고플지언정 가난하지 않고, 바쁠지언정 속박되지도 않았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노동·노동자를 해방할 수도 없다. 그들은 노동의 권리를 누리고 노동의 자유를 만끽하며 노동에 대한 가치를 존중받고자 한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고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인간이기를 요구한다. 그들은 그냥 보호받아야 하거나 그냥 배급받아야 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고 싸워야 하는 존재들도 아니다. 하루하루 일터에서 귀가하는 분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일과(日課)에서 성실히 일해온 근로자들께 오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사랑에서 벗어나고픈 인간은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의 해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