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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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라디오에서 누군가 말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했다는 말을 쓴다.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를 쓰는 상황을 말한다. 수고(受苦·고통을 받는다)라는 표현이기에 마치 불안하고 위험한 의미처럼 들린다. 혹자는 윗사람에게는 쓰지 않아야 할 ‘(상황식 연령별) 금지어’로 단정하기도 하며, 혹자는 일본식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말에서 사라져야 한다(일본에서는 ご苦労, お疲れ라고 쓰지, 수고라고 쓰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래전부터 쓰던 우리말이었고 그 용례는 숱하게 많다(조선왕조실록).

그런데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잡은 ‘수고한다’는 말의 의미는 굉장히 복합적이다. 누군가의 노동에 대하여 미안해하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성실한 근로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의미까지도 담고 있다.

“일을 하시느라고 힘을 들이고 애를 쓰신다”라는 식의 인사를 건네면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감사해하며 힘든 (누군가의) 노동을 존중하는 거룩한(?) 의사표현을 쓴다. 그렇다! 노동에 대한 존중이 배어 있기에 이 용어의 가치는 유구히 살아남고 있다.

존중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 중 하나다. 매슬로우가 이야기한 5단계의 욕구이론에서 ‘자아실현’과 함께 최상급 단계가 바로 ‘존중(esteem)’욕구다. 학술론적으로 존중욕구는 ‘자신감, 성취감을 느끼는 욕구, 자존감을 최대한 누리는 욕구’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나의 외양, 언행이나 성과를 보여주면서) ‘타인으로부터 (가치있게) 인정받고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다.

특히 그것이 일회적인 언행이나 순간적인 꾸밈(盛裝·치장)이 아니라 인간이 이루어 내는 행위나 결과에서 비롯한다면 존중의 가치는 지속적이고 고귀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노동과도 관련되어 있다.

노동에 대해, 우리 인류가 깨어난 계기들은 17~19세기를 통틀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핵심적으로는 신분철폐, 노예(농노) 해방이라는 것과 프레테스탄티즘의 근면주의(노동관)라고 볼 수 있다. 막스 베버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발전과정(發芽)이라기 보다는 ‘노동’에 대한 사회의 인식변화였다고도 보인다.

근대사회가 ‘자유’, ‘민주’, ‘평등’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에서 경제주체로 독립하게 되는 계기는 노동이라는 점을 사회학적으로 고증한다. 가진 재물(재화)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유사 이래 오래되었지만, 누군가의 활동이 ‘노동’,‘근로’라는 개별적인 재화(財貨)로서 본격적으로 대우받게 된 것은 인류사에 획기적인 변화이기도 했다.

중세 또는 봉건사회에서 하층계급의 수많은 인간이 피지배계급으로서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농토, 공장, 일터에서 노동하는 근로자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가 펼쳐진 것이었다.

노동하는 인간. 성실히 일하는 근면한 인간은 존중받는다.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물건을 가진 자가 소유권을 누리고 물건들을 거래(매매)하듯이, 인간의 노력 또는 노역 또한 그만한 대가를 받고 사회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육체노동을 하건 지식근로를 하건 간에 각각의 노력과 행위가 사회적인 가치(가격)으로 매겨져서 보상(compensation)받게 마련이다.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인간의 노동을 사회가 존중(esteem)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최근 논란이 되는) 사회구성원(인간)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가치를 부여하여야 한다는 논리(이른바 기본소득론, 적극적 복지국가론)와는 다른 것이겠다.

그렇다면 경제적 가치가 있는 노동만을 존중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존중받지 않게 되거나 사회적인 배려가 필요없게 되는가. 그렇기에, 법의 역할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법의 보호론적 입장이 작동하게 된다.

이른바 편면적 강행규정이라고 하는 개별적 근로관계법(근로자와 사용자의 개별적인 임금·근로시간-근로조건-해고-산업재해 등 문제에 관한 규율 기준)에서는 근로자를 보호하고 노동의 핵심적인 사항에 대하여 최대한도(근로시간), 최저보호망(최저임금), 판단기준(합리·공정 해고) 등을 근로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립하도록 독려한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및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에 기초한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한 바이고 지극히 형평에 부합하며 합리적이다.

헌법에서 “국가는 사회적ㆍ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라고 하고, 특히 여자·연소자의 근로를 특별히 보호하며 국가유공자·상이군경·전몰군경유가족은 우선적인 근로기회를 부여받도록 해주고 있다. 만일 여성과 연소자의 근로 가치가 일반 성인 남성에 비하여 현저히 낮으므로 임금을 무단히 낮게 책정하거나 무리한 육체적 강도의 노동을 강요하는 등의 행위가 있다면 이는 우리사회가 적절히 제재할 것이다.

이 또한 우리 헌법이 근로를 권리로서 보장하고 또한 의무로서 정하여 헌법전문의 정신에 따라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기회균등, 능력발휘 등을 기대하는 것과 부합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노동은 인간 존엄성의 이면(裏面)이면서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 더 나아가 ‘성실한 노동’으로서 우리 사회에 가치있게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러한 근로는 충분히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성실한 근로는 근로자 각자가 자아실현을 하고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일구고 여러 사회적 후생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에, 우리 사회는 비로소 ‘안전과 자유와 행복(헌법前文)’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최근 노동시장이중구조, 노동계층양극화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혹자는 노동3권 보장을 이야기하고, 나태의 권리나 기본소득제도 이야기 되고 있으며 주4일제가 이미 세계적인 추세라는 주장도 나온다.

(누구도 증명하지 않았지만) 휴가-휴게를 더 주고 복지, 급여, 처우를 더 올려야 소위 ‘일할 맛이 난다’고 쉽게 공언한다. 하지만 누구도 노동을 귀하게 여기고 노동을 존중하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성실과 근면, 근로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고 있었다’는 점은 더 이상의 연구가 부재하다. 그럼에도 안타까워할 겨를이 없다.

미래적으로 우리 사회는 자본과 자산에 노동이 종속되는 사회적 무기력에서 탈피하여야 하기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 우리는 자정(自淨)하고 자생(自生)할 시점에 와 있다. 우리사회에서 정규직-중규직-비정규직 근로자, 기간제-시간제-파트타임 근로자, 프리랜서 근로자, 예술-스포츠 종사자, 자영근로자(자영업종사자), 플랫폼근로자 등등에게 그들의 노동을 가치있게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는 것이 제일 먼저다.

근로자들은 자신의 노동이 사회통념상으로도 충분히 존중(esteem)받기를 원하고, 우리 사회는 임금으로서 가치 있게 대우해주어야 하며, 어느 노동계층에 있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존엄’으로서 대접받도록 해야 한다.

오늘도 사회는 바쁘다. 사회구성원들은 일과시간 동안 귀한 땀을 흘리거나 머리 아픈 과제를 해내고야 말았다. 우리가 누구나에게 소중한 가족이듯이, 우리 사회는 누구나의 소중한 노동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

종종 근로자들에게 ‘수고한다’, ‘수고하신다’, ‘수고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들의 손이 때론 힘들기에, 그들의 심신이 고달프기에, 우리 사회는 노동 현장에 일하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경제적인 지위를 보장하며 고귀한 노동의 결실을 존중한다. 대한민국 도처에서 오늘 하루도 수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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