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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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현장은 도처에 깔려 있다. 어디에나 노동은 있다. 누구나 노동하기에 노동은 유구했고 앞으로도 노동의 미래는 밝다.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은 근로자들(노동계층)의 전유물이 아니고, 만인의 만방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노동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용역․서비스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접하는 모든 실(實)재화들(물건)이기도 하다.

쉽게 예를 보자.

우리가 지금 상점에서 과일을 구매한다고 하자. 가격이 써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과일의 가격이 아니다. 사실 과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누군가의 노동’ 가치가 덧붙여졌다. 또, 과수원에서 과일을 구해서 그 상점까지 깨끗하고 온전하게 보관하여 옮긴 ‘누군가의 노동’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

과수원이 있다. 농부는 땅을 고르고 나무를 기른다.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더욱 보살펴서 과일나무로 육성한다. 어느덧 과일나무는 과일을 풍성하게 키우고 그 나무는 어느덧 과일로 융성해진다.

누군가의 손길에 따라 과일나무는 땅에서 자라나 스스로 크면서 꽃을 피우고 그 결실들을 맺어 세상에 나온다. 상품성을 가진 과일로서 온전하게 가치를 인정받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순간마다 농부의 노동이 분명히 있다. 세상에 재화로 뚝 떨어지는 과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누군가의 노동이 결연코 존재한다.

자! 이렇게 본다면 과일 그 자체는 본래 ‘가치’라고 할 것이 없다. 노동이라는 매 순간순간의 가치가 결국 (상품성을 가진) 과일이라는 결실로 (시장에서) 그 재화가격으로 평가를 받는다. 노동의 기여를 받아, 노동이 덧붙여진 연후에야 재화들이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도 있다.

비교하자면, 마치 원자-분자 등의 소립자 연구에서 모든 물체가 소분될 수 있기에 물체 자체는 실상 존재하지 않고 단지 힘 또는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이론처럼 들리기도 한다.

경제학에서도 리카도와 마르크스가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노동’이야말로 영속하며 그 본연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 리카도는 노동의 가치론을 숭상한 학자였고, 마르크스는 그러한 노동가치론을 더욱 격상시킨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여러 유명한 설득(사례)을 통하여, 노동만이 유가치한 상황에서 그에 따른 높은 생산성 향상이 결국 (다른 계급의) 재화 축적(잉여 독점)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 사례들에서는 일응 맞아 보인다. 생선이건 과일이건 뭐든지 물건들의 가치는 본래 무가치한 것이고, 오로지 노동의 가치만이 계속 덧붙여져서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는 논리들이다.

물론, 이러한 노동유일가치론에 따라 사회적 후생을 노동 의존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비판을 받게 되는데,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자본의 선순환효과 등이 사회 후생에 독립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하게 되었고, 종종 노동이 무언가로 대체되는 상황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이 노동에 대하여 유가치한 논의를 했었던 바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아직도 잔존하는 ‘노동자-자본가 등 구시대적인 구분론(유물론·계급투쟁론)’은 왜곡과 모순이지만, 노동의 유가치함이 영속하기를 바라는 염원만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논의과제가 될 것이다.

한편, 노동의 경계는 과연 재화의 제공으로 끝날 것인가. 재화가 공급된 것으로 노동은 끝이 나는가. 혹은 노동은 근로자계층(노동자계급)의 전유물로서만 남을 것인가. 노동계급만 노동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아니다. 노동의 끝(경계)은 사실상 없다. 이미 경계(벽)은 허물어진지 오래다. 새 시대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은 계속 발견되고 노동자가 아닌 자영근로자들의 경제영역 선점도 빠르게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레스코랑에서 식사를 마치는 것으로 노동이 종료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식사의 종료로, 계산을 마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만끽하는 리뷰 등등의 사진과 영상, 글들은 무엇인가. 재화를 소비하면서도 누군가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

어디를 다니고 음식을 접하고 문화를 체험하고 새로운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그 순간순간으로 그치지 않고, 또 다시 누군가의 노동이 덧붙여져서 SNS나 방송-스트리밍(유튜브·틱톡 등)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세상이다. 이들(인플루언서·유튜버 등)은 본래의 근로자라고도 볼 수 없고 임금을 갈구하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지시나 관리감독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노동을 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각각의 시장이 다시금 확대되어 사회적인 이슈를 불러 일으키고, 시장의 미개척지에서까지 새로운 재화들이 생산-소비되는 현재를 살고 있다.

노동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가에 대하여는, 마르크스이든 反마르크스이든 상관이 없다. 노동이 유일한 가치를 가지는가에 대하여도 논외의 문제다. 하지만 노동이 어떤 경계나 틀 안에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직시할 부분이다.

이처럼 노동이라는 것이 우리 곁을 새롭고 영속적으로 머무는 것은 단순히 ‘공산주의의 유령이 떠도는’것과는 달리 세상에 활력과 희망을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노동의 경계는 서비스의 제공이나 재화의 소비로 끝나지 않는다. 아울러 노동의 경계는 근로자와 자본가를 구분짓는 것이 아니다.

과거, 애플(社)은 새로운 컴퓨터를 내놓으면서 ‘1984(조지오웰 著)’의 통제된 세상에서 노동자들이 보는 대형 스크린에 (컬러옷을 입은 여성이) 해머를 던져 벽을 부수는 광고’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 이후에도 다르게 생각하자!(Think different)라는 광고에서 이상한 미치광이들이 무언가를 창조하면서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규칙을 좋아하지 않거나 현실 그대로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간디이든 비틀즈이든 칼라스, 알리, 히치콕, 딜런, 에디슨, 피카소이든 아인슈타인이든, 이들이 던지는 행동 때문에 계속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은 상당히 바뀌었고 새로운 노동의 형태가 등장하고 노동과 자본, 생산과 소비가 뒤섞였다. 이제 노동의 경계는 있는가. 아니 없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미치광이들 때문에) 부서질 것이다. 노동의 경계(border, limit)가 허물어진 세상, 노동자라는 계층(class, hierarchy)도 사라지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과연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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