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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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권리이자 이상(理想·이념)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기본원리이자 기본질서로서 엄연히 자유주의를 택하고 있고 그것에 아울러 민주주의를 더하고 있다(자유민주주의). 반면, 종종 사회주의국가들은 ‘공화국’ 또는 ‘민주주의’라는 정체(政體)를 내세우지만 함부로 자유라는 이상을 선택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정체는 비슷할 수 있어도 종국적인 국체(國體)는 달라진다.

노동의 권리는 자유권이자, 사회권이다(병존설). 사회복지국가에서 보장되는 사회권(근로권)보다 앞서서, 이미 모든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노동에 관한 자유로운 권리가 생래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자명하다.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에서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한다”라고 하고 헌법 제119조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롤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라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유로운 노동을 통해 사회와 기업에 재화(노동력)을 제공하며 그 댓가에 따라 당당히 자영(自營)할 수 있도록 정한 것일 게다.

유독 대한민국헌법에는 ‘노동’이라는 말이 없는데, 이는 자유권이자 사회권으로서 노동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취지에서 우리사회가 ‘근로권’으로 우대하고 노동계층은 노동에 성실히 임하는 ‘근로의무’를 지도록 하는 것에서 바탕한다고 본다.

이처럼 근로의 권리라는 사회권으로 본다면, 근로의 댓가를 보장받거나 근로관계가 부당하게 해지되지 않도록 하거나 애당초 적정한 근로의 기회를 사회에 요구하는 권리가 될 수도 있다(이에 헌법재판소는 “(우리 국민의) 근로기본권은 생존권 내지 사회권적 기본권으로서의 측면이 보다 강한 것으로 그 권리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뒷받침이 요구되는 기본권이다(헌재 1991.7.22. 89헌가 106 결정)”라고 한다.

더 나아가, 각 국민의 노동 권리가 마치 사회만의 ‘책임’이자 사회만의 ‘의무’인 양 호도하는 견해도 있으나(누구나 일해야 하고 그 노동을 사회가 무한대로 책임져야 한다는 방식), 이는 지나치게 전체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발상일 수 있다. 즉, 노동권이 사회권이기 이전에 자유권으로서도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노동의 권리는 단지 사회적인 보장(보호)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자유로이 노동의 자유를 누리고 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적정임금제)를 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예외로서 보호대상은 여성·연소자·국가유공자의 특별한 보호·최저임금제 정도다).

노동의 자유는 노동력을 가진 국민들이 가진 고유한 권리(特權)다. 노동의 자유는 노동계층(자영노동계층 포함)이 자신의 의사와 능력과 취향에 따라 노동의 내용, 장소를 선택하여 근로관계를 선택하고 그 근로관계의 당사자와 근로관계를 유지하거나 종료하는 것이다.

노동의 자유는 노동의 자유는 단지 노동을 ‘할지’, ‘하지 않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본디 ‘자유(自由)’란 그 한계에 이르기까지 최대한도로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노동의 자유는 노동주체의 능력이 닿는대로 자신의 의사에 따라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이른다. 노동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헌법과 대한민국국체의 이념이라고 할 것인데, 그렇게 본다면, 21세기 현 시점 대한민국에서 노동의 자유는 어떻게 새롭게 구상될 필요가 있는가.

자유는 ‘무언가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언론인 조지오웰(소설「1984」의 저자)은 ‘(언론의) 자유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들을 할 수 있는 (누군가의) 권리를 말한다(If liberty meas anything at all it means the right to tell people what they do not want hear·영국 BBC에 새겨진 글귀)’라고 했다. 20세기를 맞아 전세계에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사람에게 노동을 자유롭게 허하라!

노동을 자유롭게 하라!

노동의 면면에서도 그 바람은 이어진다. 20세기를 전후로 다양한 노동계급의 시도는 들불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정체(政體)가 나타나기도 한다. 100여년전 파리코뮌과 노동자·농민의 러시아혁명 속에서 사상가(文豪) 도스또옙스끼도 심각하게 고민한 주제다.

노동과 노동자라는 것에 대해, 그는 사회주의노동혁명을 힐난하며 “자유라는 것과 누구나에게의 충분한 빵은 양립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굶주림을 반대하였지만 강제적이고 전체적인 평준화는 실패한다고 예언한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사랑했기에 민중혁명의 도구로 인간이 말살되는 것을 기피했고 (공상적)사회주의 노동관을 결코 믿지 않았다. 그는 ‘(노예가 아닌) 노동’의 생명력을 신뢰했으며 종국적으로는 인류애와 자유를 지향했던 선지자였다.

노동의 자유는 거추장스러운 구속에서 벗어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이다. 우리 헌법을 보자. 자유주의에 바탕한 국체(헌법전문)에서나, 자유시장경제질서(헌법제119조)에서 비추어 볼 때, 국민들은 자신의 기회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 경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다.

그들의 노동은 엄연히 경제적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고 그 댓가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적정임금제의 보장).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편면적인) ‘보호’나 (취약계층을 위한) ‘보장’에 머물러 있었다. 지난 70년간의 입법과 정책은 그러한 방향으로 계속 진화하였다. 누군가의 (최저) 임금도 보장해줘야 하고, 근로시간을 제한해야 하며, 유해하지 않거나 괴롭힘이 없도록 근로조건을 더욱 좋게 만들어 줘야 하고, 일자리도 제공해주거나(고용정책) 그대로 유지되도록 해줘야 한다(해고제한 등).

그런데, 그동안 정작 노동의 자유에 관한 논의는 좀처럼 발전되지 못했다. 노동이 국민의 기본권이고 대한민국 자유시장경제의 축(軸)이라는 점을 간과해왔다. 물론, 법률적으로도 문제의 바탕이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이 근로의 권리, 근로의 의무를 상호 상관(相關)하게 두면서 이러한 자유권을 도외시한 면도 있다.

그런데 근로의 의무는 점점 사문화(死文化)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복지국가의 정치이념이 어느덧 ‘일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가 보호한다’라는 식으로 노동관을 변화하고 있는 추세다. 현재 대한민국사회에서 노동의 의무는 없다! 사라졌다!

그렇다면, 노동은 계속 보호, 보장되는 그 무언가에 계속 머물러 있는가. 생래적으로 또는 본태적으로 존재했던 노동의 자유는 어디로 갔고 자유로운 노동은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가. 이제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노동이 단지 보호의 대상이라는 사회권에 그냥 머물러서는 안된다. 노동의 권리는 자유권이자 사회권이라는 관념(병존설)을 본다면, 더더욱 노동의 권리는 자유권에서 그 개념을 다시금 시작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층의 국민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구걸하는 부랑자’가 아니다, ‘노동이 극도로 어려운 병약하거나 장애 계층’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주의에 바탕한 노동의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이며, 자유시장경제의 한 영역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노동(재화)의 댓가를 요구하는 당사자이다.

이제 노동도 과거에 머물러서 계급투쟁의 장(場)으로 진화하거나 사회보험·사회보장하는 특별한(?) 권리라는 인식에 머무르는 것을 과감히 탈피하여야 한다. 실질적으로 특권이 되지 못하면서, 이렇게 정치사회적으로 특권화하는 동안 노동을 기치로 하는 정치집단이나 노동단체가 커져온 것을 우리는 목도하곤 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기업은 영리를 추구하고 사회는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꾀한다. 노동력을 가진 국민들은 사회와 기업에 자신의 기회와 능력을 요구하고자 한다. 차별과 폐습과 불의는 당연히 제재받아 마땅한데, 이것은 노동이라는 자유권을 본질적으로 박탈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의 노동은 약하지 않다, 그들의 노동은 병들지 않았다, 모든 이의 노동은 소멸하지 않았다. 노동은 단순히 보호되기 보다는 본래의 자유를 만끽하게 두어야 한다.

오래전, 맹자는 (정치의) 개입을 반대해왔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사람들을 자연히 놔두면 노동하는 온세상인들은 마음껏 뽕나무를 심어 비단옷을 입고 가축을 길러 고기를 먹으며 밭을 농사져서 채소를 수확할 수 있고 농사를 게을리하지 않아 가족이 굶주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오늘도, 내일도, 노동의 아침이 밝아온다. 추운 겨울, 더운 여름을 불문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매시간 수백 만 명이 통근차량으로 이동하고 있고 1,700만명이 일터에서 자신의 노동을 제공한다. 그들은 경영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대우를 받는다(근로의 대상(代償)적 성격). 과거 사회주의 이상주의자들은 노동의 해방을 꿈꾸었지만, (그들이 예상한) ‘사회주의유토피아’나 ‘노동의 종말’은 단연코 틀렸다. 사회주의이건 전체주의이건 노동의 자유를 속박하는 국체(國體)는 파멸했다.

겨울바람이 아직 매섭다. 밤에 운전을 하는 사람이나, 새벽에 채소를 나르는 사람이나, 추운 겨울바람에 파도와 맞서 물고기를 실어 올리는 사람이나, 지난 여름에 땡볕에서 농작물을 수확했던 사람이나, 어두운 탄광에서 눈을 비비며 탄을 캐는 사람들이나, 더 이익되는 방향으로 가격제안서를 만들어 세계 방방곡곡에 이메일을 발송하는 사람들이나, 대한민국 구성원의 매순간 노동은 자유롭고 소중하다. 헌법에서 최대한도로 발휘하게 하는 노동의 자유를 누리도록 하면서, 이처럼 대한민국 국민들의 노동은 누군가를 옥죄는 구속이거나 속박이 아니고 모든 국민은 정정당당하게 경제적 자유로움을 느낀다.

나아가, 대한민국 헌법은 한국사회의 노동에 있어 종국적인 이상향을 그린다(헌법 제32조 제1항).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근로의 권리를 가지고, 국가는 사회적 방법과 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한다’고 과감히 비전을 제시한다. 21세기의 노동은, 온갖 이념과 계급, 투쟁과 피해의 의식에서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Back to basic). 본래의 노동이 스스로의 자유를 최대한도로 찾을 때는, 그 자유를 (우리 사회가 스스럼없이) 가치 있게 여길 때야 가능할 것이다. 노동이 자유로워지고 노동하는 계층이 그 댓가로 정당하게 존중받는 것이 그 노동의 자유가 만개하는 시점이 될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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