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국민의 4대 의무로서는 국방·납세·교육·노동이 있는데, 특히 노동은 사회권이자 자유권인 노동권과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근로의 의무가 병존한다. 헌법은 노동 영역에 있어서 국민이 지켜야 할 ‘근로의 의무’에 대하여 짧게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하도록” 하는 반면, ‘노동의 권리’에 대하여는 단순히 자유권을 넘어서서 사회권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국가와 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을 당부하고 있다(노동권은 자유권이자 사회권으로 보는 견해).
본래 대한민국 사회는 본태적으로 유한계급과 지배계급을 타파하고 있기에(헌법 전문에서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고’라고 정함), 사회 전반에 걸쳐 근로(노동)의 권리는 개별적 근로관계법상으로나 집단적 노동관계법으로나 권익이 신장하고 있고 그 보호의 정도가 확고해져 가고 있다. 그렇기에 헌법은 2개의 조문을 들여서 근로의 권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정한다.

이러한 법률적 기반를 토대로 우리나라는 노동관계법령 있어서 가히 선진국이라 칭할 정도로, 수십년간 노동관계의 사각(死角)지대를 해소하고 새로운 노동의 영역까지도 세세히 규율하는 등의 장족할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불과 100년 전에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해 냈던 경과를 보면, 노동의 권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중화민국 창건을 주도했던 쑨원에게조차도 “노동의 권리”는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서양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20세기 초 중국에서 농민, 도시민 등은 모두 ‘일자리’를 찾아서 헤맸고 그나마 싱가폴, 홍콩, 상해 등의 외국 조차지 정도가 생계유지를 위한 일자리가 간간이 있었다. 사람들은 헐벗고 가난했다.
본래 쑨원은 하와이에 유학을 하고 홍콩의대를 졸업한 후, 개인병원을 운영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그런데 막상 외국인 호텔, 외국인 공원, 외국인 주거지를 벗어나면, 그는 빈민들로 들끓는 중국인 사회를 마주했었다. 쑨원은 고민했다.
“왜 나는 일이 있고 저 사람들에게는 일이 없는가”, “나는 배가 부르고 저들은 배고픈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답이 없었다. 이역만리 고향을 떠나온 중국인들은 이름도 없이 ‘꾸리, 쿨리, 苦力’라고 불리며 항만과 야산에서 노예처럼 일했고 그 대가는 단지 숙식을 때우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자리조차 부족했다.
결국 쑨원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사람의 질병은 고쳐본 적이 있지만, 사회의 병폐는 접근해 본 적이 없는 한낱 백면서생이었다. 쑨원은 많은 실패와 고난을 겪고 나서야 사상의 기초를 마련하고 (중국인) 누구나에게 일자리가 ‘권리’임을 깨닫는다. 거창한 혁명을 하기 전에 사람들을 일깨우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중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남자이건 여자이건, 청년이건 장년이건,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일하는 것은 마땅히 사람의 권리가 된다는 점을 전파할 사정이 급했다.
일찍부터 견문을 넓힌 그는 세 군데에서 그것을 보았다. 먼저 미국 유학시절 하와이에서 미국인과 중국인들이 모두 일터에서 일하고 있고 각자 그 일의 대가를 누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홍콩과 상해에서 외국인과 중국인들이 서로 차별되어 중국인들은 일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훗날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이 이미 공히 일할 권리를 고르게 누리고 그 대가를 요구하는 노동운동(또는 공산운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중국에, 중국인에게 ‘노동의 권리가 없다’는 것은 자연법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고 노동의 박탈이 인류역사에 있어 불행하고 부당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다.
결국 쑨원은 나중에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로 발전하는 그 태동에서, 혁명가로 변신을 시도하면서 ‘농민에게 토지를’, ‘노동자에게 일터(일자리)를’ 주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는 (민권·민생의) 권리론을 확립했다. 노동을 제공할 인력(중국인)들에게는 응당 당연하게 노동의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삽시간에 이러한 생각은 긍정의 선순환을 이루게 된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노동의 권리는 무상적이나 의무적인 것이 전혀 아니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격체로서 응당의 대우(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임을 중국 전역과 세계 만방에 공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쑨원의 사상은 노동자, 농민, 국민 전반에게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후 100년 사이에 아시아 전역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현재 중국이나 대만이나 가릴 것 없이 중산(中山) 쑨원은 마땅히 중화에서 사람(민)의 나라를 일구자고 주창한 (유일한) 국부(國父)임에는 변함이 없을 정도로, 쑨원의 사상적인 선행(先行)은 미증유의 것임에는 분명하다.
쑨원이 그저 그런 존재였다면, 의사였던 자신에게 부여된 노동의 권리와 대가를 꿀처럼 향유하고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중국인들은 정치, 사회적인 차별 외에도 가장 근원적으로 일할 기회(적어도 균등한 기회)를 상실한 것이 원통했을 게다.
아쉽게도 실제로 중국역사에서는 그 쑨원이 주창한 신해혁명(1911) 이후에 혁명이 가라앉고, 위안스카이의 전제복정과 군벌들의 난립, 일본제국주의 침략 등등이 벌어지면서 쑨원의 사상은 묻힌다. 그렇지만, 이후에는 적어도 일자리에서 차별받는 중국인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뜻깊다.
노동의 권리는 단지 헌법이나 법률에 규정하고 있거나, 엄숙한 문서(章典)에 그럴듯하게 써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의 여러 나라에서 노동은 권리로서 써 있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일할 권리는 마치 생물에게 공기였고 마른 땅에 빗물일 정도로, 당연하고도 필요하지만 늘 부족했던 무언가였다. 그래서 그들은 갈구(渴求)했고 권리로서 당당히 쟁취하게 된다.
어쩌면 노동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노동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향유하는 권리일 수는 없지만, 사회구성원으로서 가장으로서 사람으로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의복이다(사람이 옷이 없어도 사람이기를 부정당하지는 않지만, 추위와 외력에 건강을 지키기는 어렵기 때문이기에). ‘마치 개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중국인)에게는 응당의 생명줄(대우)이었던 것이었고, 수많은 중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신세계’의 입구가 된다.
노동의 권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시아권 전역에서도 불과 100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대우와 노동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게 된 아시아인들이 훗날 서양열강 속박을 모두 풀어내는 원동력을 가지게 된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정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권을 주창했던 아시아의 선구자 중산(中山) 쑨원. 일생토록 민권과 민생을 지향했던 그였다. 참으로 오래전의 혁명가인 쑨원에게서 노동하는 인간의 향수(香水)와 권리의 미풍(美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