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최근 <가짜노동>이라는 책을 통해, 북유럽의 연구자(뇌르마르크)는 현대사회의 ‘의미 없는 노동(?)’을 고발했다.
이미 미국의 작가 멜빌(1819~1891)은 <필경사 바틀비>라는 작품에서 “의미 없는 노동에 저항하는 필경사(옮겨 적는 사람) 바틀비가 노동을 거부하다가 감옥에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무의미한) 노동을 조롱하고 우화했다.
훗날 찰리 채플린이 주연(主演)한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도 “나사를 (열심히) 조이다가 실직하고 정신질환자가 되어 감옥에 가게 되”는 식으로 꽤 흥미롭게 재연되고 있다. 채플린은 (이름도 정해진 게 없는) 그냥 ‘떠돌이(tramp)’인데, 대형 공장에서 그럭저럭 그저 그런 일을 열심히 반복한다. 근로자로서 노동을 신성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죄(?)로 결국 실직과 옥살이를 반복한다.
범법자로서 서로 친해진 떠돌이(채플린)과 소녀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떠돌이) 노력하면 좋아질 거야”, “(소녀) 그게 무슨 소용이죠(What’s the use of trying?)” “(떠돌이) 힘내자(Buck up). 죽지마. 우리는 버틸 수 있어”라고 말이다. 저 멀리 있는 희망을 찾아 새벽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다시 사회로 발을 디딘다는 (과히) 영화적 설정이다.
20세기 자본주의 사회는 수천 년간의 과거를 훨씬 뛰어넘는 생산과 효율을 일궜다. 생산요소의 배분과 노동현장의 분업은 전세계를 풍요롭게 살찌웠다. 물질은 풍부했고 세상은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회의 계층이 자본의 유무에 따라 새롭게 재편되면서, 극도의 노동에 시달리거나 극한의 기아에 빠지는 노동계급이 생겨났다는 거다.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성실하게 닥치는 대로 뭐든지 얼마든지 일하는 노동자가 종종 도저히 턱없이 적은 보상으로 연명 하는 모순이 도래한 것이다.
자본이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고용해서 원하는대로의(?) 아무(?) 노동이나 지시했다. 물론 자본가니까 그들에게 이익이 발생하는 노동을 명령했겠다. 하지만, 정작 노동을 하는 근로자들은 절박한 생존을 위해 급급하게 ‘반복되는’ ‘명령’만을 이행할 뿐이었다.
마치, 테트리스(TETRIS)의 조각들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 세상의 모든 근로자는 (목적과 이유를 불문하고) 여러 조각들을 고르게 나열해야 했던 게다. 그렇다면 ‘잘 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겠지만, 그러면서도 (모순은 더 심해지는데) 결국 업무의 내용과 수준(質)은 바뀌지 않으며서 점차 테트리스 조각들이 더더욱 빨리 떨어지는 난국(難局)을 감내해야 한다는 거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필경사 바틀비가 점점 능숙하게 베껴 쓴다거나, 떠돌이가 나사를 더 빠르게 조이는 것들은, 노동의 의미를 찾기 어렵게 한다. 마치 ‘기계’나 ‘로봇’으로 대체될 일을 노동자에게 노동으로서 강요하는 것으로 변질되기에 딱 좋다.
자본가인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서류 검토를 해볼까”, “아니면 예전처럼 베끼는 일을 더 해볼래”라고 제안하지만, 바틀비에게는 더 이상의 노동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기에 바틀비는 일을 거부한다. 공장장은 계속 일하라고 하지만 떠돌이는 나사 조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해내고, 결국 정신착란 상태에서 큰 사고를 친다.
실직한 떠돌이는 거리에서 ‘일자리를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구호에 빠지지만 그에게는 걸맞지 않는 오해(?)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바틀비와 떠돌이가 원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노동’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노동을 원한다면, 누군가는 그 노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와 고용주는 근로자에게 (의미가 없을 수 있는) 노동을 강제하지 못한다. 이건 노동을 가장(假裝)한 강요일 것이다. 근로자는 자신의 노동을 존중받을 수 있고, 반드시 특정한 노동만을 명령받아, 그에 복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근로자는 노동의 의무(duty·oblidge)를 가지지만, 각자의 노동을 선택할 자유(liberty)가 있고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존중받을 권리(right)를 가지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로 일어선 나라(소비에트연방)는 전세계에서 최초로 일자리 부처를 만들었다. 그 정책은 큰 유행을 타서 전세계에 퍼졌다. ‘모든 인민이 일하여야 한다는 명분 하에 집단적인 생산체제를 노린’ 꼼수라고 비난받기는 했어도, 이미 100년 전에 정부가 인민들에게 일터와 일자리를 주려고 했다는 시도는 참으로 획기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동안 지구상의 수억 명에게 사회주의적인 실험을 수십년 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노동의 의미를 부여받고자 각자의 일터에서 성실히 일해온 구소련의 근로자들이 자리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의 의미는 스스로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그 가치를 존중할 때 비로소 더욱 빛을 발한다. 근로자들이 신성한 일터에서 각자의 노동을 의미 있게 수행하고, 사회와 고용주는 근로자의 노동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그 가치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은 모든 사회의 청사진이 될 것이다.
노동계, 노동시장이라는 분류법에서 머무르거나 단순히 ‘실업률’과 ‘고용률’, ‘최저임금제’와 ‘실업급여제’ 등의 정비를 넘어서서, 앞으로 우리사회에서 노동의 의미가 노동의 가치로 서로 등가교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미래 대한민국에서 근로자가 근로를 완수하면서 근로의 권리를 최대한 향유하고, 사용자가 근로자의 근로에 대하여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의무를 다하게 된다면, 정부와 사회가 매번 양 당사자간의 관계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점차 불필요하거나 무력해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 신(新)거버넌스로서의 ‘작은 정부’를 넘어서서, 대한민국 사회는 노사 각자의 의식 전환을 통하여, 사회 구성원 누구나 가진 ‘노동의 의미’가 다른 양면인 우리 사회의 ‘노동의 가치’로 거듭날 수 있도록 상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