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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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묻는다. “일을 왜 안 하세요?”

“맞는 일을 찾고 있어요”, “자격증 공부 중입니다”, “오래도록 하다가 잠시 쉬고 있어요”라는 부류가 있다. 아니면 “일을 하는 건 내 자유 아닌가요?”, “노동을 왜 강제합니까”

서로 간에 뭔가 허전하다. 왠지 배고픈 대화다. ‘(육체가 건강하고) 세상에 할 일이 널렸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냐’라는 생각으로 (차갑게) 상대하는 것은 전근대적으로(?) 취급되기 일쑤이니, 차분하게 문답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간명하지만, 질문과 응답에서 쉽게 교집합(공감, 이해)이 생기지 않는다.

역시나 각자에게 천차만별의 사유가 있겠지마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누구나가 누구나에게’ ‘언제 어디서나’ ‘일(노동)’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헌법에 노동의 의무가 규정되었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스스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세계에 널려 있기도 하다!

우리사회의 근원적 약속(헌법)으로 돌아가 보자. 자산이 있으면서 일을 하지 않는 유한계급(신분)에 대해서는 우리 헌법이 철저히 이를 배격한다. 우리사회는 헌법상 누구든지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고 있기에 (가지게 된) 자산과 권력으로 특권계급화할 수 없다.

재산권은 공공복리에 따라 행사되어야 하기에 많은 조세부담과 규제가 따르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부재 지주가) 소작을 놓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우리는 헌법에서 근로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특이한 국가다. 아울러 특정계급(계층)을 위한 (착취적이거나) 의무적인 노동이 배척된다. 근로자들이 매번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하여 국민들은 모두 경제적 주체로서 보장받는다.

그런데 정작 우리사회에서도 이미 노동을 기피하는 현상(現像)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노동기피층의 형성). 향후 만연화된다면, 나름 문제가 크다. 주변인들이 노동을 권해서 될 해결될 일도 아니고, 헌법과 사회상규에서 노동의 의무(근로의 의무)가 있다는 점을 훈계하여서 바뀌는 상황도 아니다.

이쯤 되면 사회복지국가인 우리나라는 당연히 그들의 생존이나 최하위 수준의 생활까지 보장하여야 하는데, 성실히 일하는 다른 국민들이 ‘사회복지(?)의 부담’을 져야 한다. 최악의 경우, 이러한 무산무노동계층이 오히려 노동계층보다도 수혜를 더 받을 수도 있다.

훗날 (우리) 사회는 노동기피현상도 발생하고 구조적인 갈등도 발현될 가능성이 커질 게다. 과거에 로마가 그러했고 청나라가 그러했듯, 노동기피, 도박·마약 등등의 유흥과 나태는 필시 사회경제에 영향을 주어 종국적으로는 사회적인 붕괴를 가져왔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노동은 의무가 아니다. 헌법상 근로의무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노동의 의무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헌법이라는 거대한 틀(약속)을 가지고도 우리 사회가 함부로 개인을 강제할 수 없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거나 제재하는 방안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손을 놓아야 하는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계속 빵을 주거나 아니면 굶도록 방치하는가.

여기 일 예찬론자가 계시다. 이미 100대 인생을 살고 계시는 김형석 교수님이다. 한국사 100년, 일제강점기, 해방후분단시기, 한국전쟁, 남북체제경쟁시기, 한강의 기적 등등을 모두 직접 경험하신 분의 시각이다.

“일을 사랑하고 즐기지 못하는 국민은 행복과 국가적 번영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일을 기피하는 개인은 인간의 사회적 권리를 포기하고 일의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불행과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중앙일보 기고문 <왜 열심히 일해야 하나> 발췌)”,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박정희 경제성장 시대를 열심히 살아왔다.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일을 사랑하면서 즐겼고 그 정신이 행복과 인생의 가치를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주인공 한자와는 해고에 직면한 근로자들과 외친다.

“이 항공사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회사는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현장에 계신 사람들 한분 한분이 땀 흘려 일해 온 전통 때문입니다. 현장의 사원들을 열심히 일하고 싶어 합니다. 하늘을 지켜온 긍지를 가지며 일하고 있습니다.”, “일터와 일을 빼앗긴 사람들은 화가 나 있습니다. 일을 주지 않는 것, 그 자체에 화가 나 있습니다.”

이들은 성실한 노동을 찬양하고 헌신적인 노동을 갈구한다. 노동의 가치를 추앙하는 것에서는 그 사회적인 선순환에 맞닿아 있다. 옥스퍼드의 폴 콜리어 교수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자존감을 고양해 생산성을 발휘하는 주체”라고 하면서 기본소득배분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예찬론은 선구적이고 참신한 의식임에는 분명하지만, 사회일반에게도 그대로 전파하기도 어렵다. 아울러, 사회 구성원이 (스스로) 하지 않는 노동을 (섣불리) 권장하기도 곤란하다.

그렇기에 우리사회가 노동이 필요할 때 어떤 방법이 있을까.

역사에서는, 두 가지 해법이 있었다.

첫째는 1930년대 독일사회주의노동당과 1940년대 소비에트연방, 1950~60년대 중국공산당에서 실시했던 공공근로사업이었다. 모든 국민(인민)은 일해야 했다. 독일에서는 경제공황을 극복하면서 아우토반(제국고속도로)을 만들었다. 성실히 일한 독일인들에게 폴크스바겐이라는 저가형 국민차 ‘꿀’(당근)도 제공되었다. 독일인들은 명령에 맞춰서 제국수도를 건설했고 광산을 개발했으며 함부르크의 항만을 중창하고 라인강을 준설했다.

사회주의 소련(소비에트 유니언)은 혁명이념에 맞추어 죄수들을 이주시키면서 우랄산맥·시베리아의 불모지에 집단경영기업과 강제노역소를 운영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았기에 ‘하나가 전체를 따라가고 전체가 하나에 모든 의무를 부과’했다. 누구나 일했고 일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가는 작았고 의무는 거대했다. 역사가 증명하듯, 독일은 집단체제에 빠져들어 전쟁까지 이르렀고, 소련과 중국은 생산성저하, 집단기근, 인권유린의 참혹한 지도체제를 낳았다.

둘째는 미국식의 뉴딜정책이다. 과거 영국은 산업혁명의 후유증을 극복하고자 전세계 식민지경영에 눈을 돌렸던 사실이 있다. ‘쌓아 놓은 물건을 밀어내는’ 시장개척만이 답이었던 제국주의였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현대의 길목에서 미국은 당황했다. 경제공황으로 일자리가 줄자 사람들은 불만을 쏟아냈다.

이제 정부와 기업은 일자리제공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산으로 들판으로, 철도로 항만으로 내보냈다. 물론 대가가 있는 노동이 장려되었다. 대규모 사업기회를 얻은 기업에서는 (동원된) 노동자에게 특별한 보너스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모든 근로는 계량화되어 적정한 임금을 받도록 장려되었다. 수혜를 누리는 측이 노동자에게 응당의 댓가를 직접 주는 문화(Tip문화)도 전국적으로 퍼지기에 이른다.

독일과 소련, 중국에서는, 나라가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라는 이념으로 전파된 것이 특이하다. 강제적이거나 동원된 인력(labour)으로 사회는 외형만 거대해진 채로 척박하게 굴러갔다. 단순히 노동이 강제된 문화가 고착화되었다.

반면, 영미계 국가에서는 여전히 노동이 철저히 개인영역이었기에 당사자들이 스스로 방안을 찾았다. 노동이 필요한 사람과 노동의 대가를 원하는 사람이 교환했기에, 기업은 적정한 기준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노동에 대한 예우가 되었다(적정임금, prevailing wage의 확립). 어쩌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바라야 그 노동의무(부담, burdun)를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기 마련이었다.

역사에서 볼 때 정부와 권력자가 일자리를 만들어 주거나 노동을 강제하는 여러 정책과 수단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사회에 노동의 교환을 일임하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정당하게) 받도록 하여서 노동에 대한 가치를 귀하게 만드는 방법은 전세계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노동을 예찬하여 사람들에게 그 인식을 각인시키는 것은, 사명감을 가진 근로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전사회적으로 일반화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국가가 주도하여) 사회적으로 노동을 강제하는 방안은 모두 역사적으로 실패했다. 그것은 결국 사회의 붕괴까지 이어졌다.

하버드 대학의 맨큐 교수는 미래에도 노동은 반드시 필요하고 노동이 미래사회의 성장과 혁신의 동력이라고 선언했다. 미래에는 노동은 절실하다.

그러므로, 사회는 노동에 정당한 대우를 하고 노동이 자유와 권리가 되어야, 종국적으로 그 사회는 건강해진다. 노동이 스스로에게 짐 지워진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쑨원 선생 이후로 노동은 권리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고 사회는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정당한 노동으로서 우리사회가 대우할 때 (근로자에게) 의무로서 요구할 수 있다. 사회가 정정당당하게 필수불가결한 노동을 대우할 때 노동자는 떳떳해진다. 노동이 권리이자 자유이기에 (더이상) 의무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된다면, 그 사회는 건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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