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Gratuity Fee(사례비, 감사비). Service Fee(봉사료). Service Charge(봉사비)...
계산서에 응당 적혀 있고 지불이 당연시된다. 최근에는 세계에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다. 여러 명칭으로 불리지만, ‘TIP’(서비스사례, 추가금, 보너스 등의 속뜻)이라고 흔하게 불린다. “당신을 신속하고 좋게 모십니다 To Insure Promptness”라는 의미다.
정작 영국과 유럽에서는 팁 문화가 금새 사라졌는데, 그건 “노동자에 대한 적선(積善)”, “노동 멸시”라고 하면서 유럽 사회가 팁문화를 곧잘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8~19세기 사회주의가 전 유럽을 배회하던 시절에 그러한 인식이 퍼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최근 팁문화는 전세계로 부활하고 있다. 북미권에서는 팁문화가 정착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관광업, 숙박업, 요식업, 유흥업에서 차차 흥행하여 전(全) 서비스산업(ex. 미용, 운송, 주차대행)에도 도입하려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물론 거센 반발이 있다. 소비자들은 “이게 의무냐(You Have to TIP?)”라고 따지고 있고 “팁플레이션”(팁이 만드는 물가인상)이라고 한탄한다. 고객이 주차장에 스스로 주차했는데 발렛비와 팁을 요구하는 사례도 등장했고, 드라이브쓰루 고객이 햄버거를 받기만 했는데도 팁이 청구되었다. 이런고로, 사람들은 팁을 이유로 싸운다(‘팁 셰이밍(tip shaming)’).
그런데 팁을 받는 근로자들은 ‘살기 어렵다’, ‘힘들다’고 매번 하소연한다. 팁을 받는 서비스종사자들은 “최저임금 위반의 꼼수”(최저임금 이하의 기본급을 팁으로 메꿈)라고도 푸념한다. 가뜩이나 (서비스업계의) 최저임금이 낮은 편인데(미연방법, 각 주법), 팁으로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의견도 있다. 마치 기본급을 낮게 조정하고, 성과급(상여)·수당·후생 등을 높여서 고용을 유지하는 아시아권 기업들의 임금문화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미국의 노동법에는 팁을 받는 근로자나 업종에는 최저임금의 준수가 완화되어 있는데. 최저임금을 계산할 때, 사용자가 직접 근로자에게 주는 금액과 또 다른(?) 사용자인 고객(client)가 근로자에게 사례하는 금액(tip)을 합산하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고급 서비스직종에서는 오히려 기본급자체는 무척 적고(시급 1~2달러) 정작 종사자의 실질수입 대부분은 팁이 되는 경우도 있다.
2025년 현재, 전세계에서 팁문화를 그냥 배척하거나 부정할 이유는 사실 없다. 그들도 한 사람의 근로자이고 그들의 노동에 대하여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니 말이다. 비교하건대, 물건을 사면 따로 10~15%의 부가가치세 등의 세금을 별도로 내야하듯이 말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마태복음)”의 말씀처럼 세금은 별개로 꼬박꼬박 받아 갔던 바다. 물론, 노동에 상응하지 않는 무분별한 팁이거나, 팁을 의무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면 안된다. 아울러 ‘서비스의 질’, ‘고객의 만족’과 무관한 팁의 강요는 앞으로도 논란거리를 가져올 게다.
아무튼, 팁문화의 호불호 또는 존폐논란과는 별개로, 이러한 팁 문화를 보자면, 누군가의 노동에 대하여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노동을 제공받는 당사자에게 이용료를 지불하도록 하는 것은 일응 응익부담, 응능부담에도 맞을 수도 있다. 팁을 통해 사용자(본래의 고용주가 아닌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가 응당의 댓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시스템인 것은 분명하다.
작금의 21세기 복지사회에서, 국가(사회공동체)는 사회 전체에 (서비스산업 종사자를 비롯한) 수많은 근로자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그들을 고용하도록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방법은 뭘까. ‘억지스러운 (반)강제적 노동’은 모조리 실패했는데, 독일사회주의노동당, 소비에트노동사회당, 중국공산당의 공통적인 패착이었고 최악의 흑역사다.
그렇다면 ‘근로의 댓가를 최대치로 지불’하는 방법은 어떨까. 첫째, 그 댓가를 모두 (고정) 사업주·사용자가 전부 부담하여야 하는 경우도 있겠다(종신고용형 근로의 탄생). 이른바 일본과 아시아의 기업 종속형 급여체계다. 때론, (일시) 사용자 또는 (서비스) 이용자가 부담하는 경우도 발생할 것이다. 이른바 북미식의 반(半)고용형 급여체계(성과급문화 또는 팁문화)로 발전하고 있는 바다.
다시 이야기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팁’문화를 분석해 보자. 미국과 캐나다는 이미 서비스업을 지탱하는 문화가 되었고, 1억 명의 근로자들에게 수입의 (최소)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근로소득임이 분명하다. 북미인들은 이 제도를 ‘최저임금 채우는’ 보전으로 활용(팁 크레딧 tip credit)하거나 ‘(부담없이) 순수한’ 소득(Income 아닌 Earnings)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누군가의 노동 댓가를 수혜를 받는 자에게 직접 요구하는 것으로서, 북미권의 노동 교환가치의 특이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직접) 고용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급여(댓가)를 주어야 하는 특별한 문화가 되었다. 실제로 미국 사회는 여러 차례 경제공황을 거치면서 노동에 대한 적정한 댓가를 지급하도록 하는 ‘적정임금제’(최저임금제의 성장형)가 실시되었다. 더 나아가 특정 사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노동의 댓가는 그 노동을 누리는(향유하는) 누군가에게도 요구할 수 있다는 인식은 신선한 측면이 있다.
이런 논지에서, 최근에 우리사회에 등장한 공연·영화 등 관람료(이용료) 과다 논란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에 “예술가는 창작이라는 노동을 하고 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논리도 등장하고 있다(중앙일보 2024년 11월 2일자 칼럼 ‘예술가는 창작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우리 대법원은 ‘인간의 생명은 전지구보다 무겁다(대법원 판결문)’라고 단언하는데, 어쩌면 북미사회에서 전세계로 퍼지고 있는 팁문화는 ‘노동의 댓가는 무겁고 신성하다’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의 팁문화를 보면서, 인간의 노동에 대하여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야말로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마련이다.
루쉰의 소설 <공을기>는, 과거를 준비한 선비인 공을기가 한량으로 (놀며) 지내는 일상을 보여준다. 반면 주점 소년 같은 일개(一介) 노동자들은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면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비웃음에 직면한 공을기는 외상값이 밀려 더 이상 주점을 찾지도 못하고 갑자기 사라진다. 함형주점의 황주값은 당당히 낼 수 있는 여러 노동자들이 (무노동 지식인) 공을기의 추접한 몰락을 바라보는 것은, 노동이라는 것이 (만인들에게) 신성한 권리로서 당당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노동은 스스로에게 짐지워진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주는 것이며, 주점소년은 황주값을 당당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고 도시근로자들이 오히려 떳떳하게 황주와 콩을 시켜 먹을 수 있었다.
노동의 댓가는 ‘월급’, ‘팁’, ‘보너스’ 등등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우리 사회와 사회구성원들이 근로자들에 대하여 부여하는 신성한 ‘특권’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근로자는 그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사회는 그들의 노동에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라야, 비로소 모두가 건강해진다. 그리고 모두 더욱 신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