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아 EBN 생활산업부 기자.
이재아 EBN 생활산업부 기자.

글로벌 명품 브랜드는 언제부터 ‘안전’이라는 품목을 취급하지 않게 된 걸까. 소비자가 명품에 지불하는 값비싼 가격에는 단지 디자인과 품질만이 포함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브랜드가 축적해온 신뢰, 고객 데이터를 관리하는 책임감, 고급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 전반의 완성도가 녹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련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는 이런 기대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몽클레르, 루이비통, 디올, 티파니, 까르띠에까지.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이 줄줄이 해킹에 뚫리고, 이를 소비자에게 뒤늦게 알리거나 축소 공개하는 모습은 당혹감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몽클레르는 해킹 사고를 인지한 지 수개월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대응에 나섰고, 루이비통은 사고 발생 한 달이 지나서야 고객에게 공지했다. 이는 단순한 시간 지연이 아니라 고객과의 신뢰를 저버린 행위다.

정보 유출의 내용도 심각하다. 이름, 생년월일, 이메일, 연락처는 물론이고, 구매 내역과 신체 사이즈까지 포함됐다. 단지 개인정보가 아니라, 명품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이 고스란히 외부에 노출된 셈이다. 명품을 사는 이들이 그 제품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고, 브랜드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누리는 시대에 이 같은 정보는 해커들에게 무엇보다 값진 표적이 된다.

더 큰 문제는 반복이다. 올해에만 명품 브랜드 여러 곳에서 동일한 유형의 보안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닌 구조적 결함을 암시한다. 디지털 전환이 빠르게 이뤄지는 가운데, 명품업계의 보안 인식과 시스템은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고급스러운 오프라인 매장, 정제된 마케팅, 품격 있는 응대 뒤에는 보안이 부실한 백오피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들 브랜드가 사고 초기 대응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준 무책임한 태도는 더욱 심각하다. 소비자에게 피해 사실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거나 범위를 축소해 전달한 점은 단순한 실수로 보기 어렵다. 고가의 상품을 취급하면서도 정작 고객 정보에 대한 존중과 보호는 뒷전이었던 것이다. 이는 소비자를 ‘VIP’로 대우한다는 명품 마케팅의 진정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 같은 허술한 대응은 자칫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유출된 정보가 범죄에 악용되거나 2차 피해로 확산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고객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정보가 흘러나갔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명품 브랜드들이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보다 엄격한 기준과 철저한 책임 이행이 요구되는 이유다.

물론 글로벌 명품 브랜드라고 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는 없다. 사이버 공격은 점점 지능화되고,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고 이후의 대응이다. 빠르고 투명한 공지, 실질적인 보상, 재발 방지 대책은 소비자가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번에 드러난 브랜드들의 태도는 이 기본조차 무너뜨렸다.

한국의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몽클레르에 과징금과 과태료를 부과하며 “다중 인증 등의 안전한 인증 수단을 반드시 적용하라”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든 해외든 소비자의 정보는 동일한 수준으로 보호돼야 하며 법의 적용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명품은 단지 고가의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고객이 신뢰와 가치를 담아 지불하는 선택이다. ‘프리미엄’이라는 단어는 가격표에 붙는 수식어가 아니라, 브랜드가 지켜야 할 약속에 해당한다.

디자인만 세련되고 외형만 빛나는 명품은 오래가지 못한다. 정보 보안 등 일련의 시스템 역시 ‘명품’의 핵심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으며 브랜드도 이제 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고객정보가 해커들에게 사은품마냥 쥐어지는 경우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된다면 그들이 오랜 기간 철옹성처럼 지켜오던 브랜드 가치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이비엔(EBN)뉴스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