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바리조선이 건조한 8만4000DWT급 벌크선. [출처=이마바리조선]
이마바리조선이 건조한 8만4000DWT급 벌크선. [출처=이마바리조선]

한때 세계 선박 건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며 '조선 왕국'으로 불렸던 일본. 그러나 지금은 한국과 중국의 양강 구도에 밀려 예전의 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업계에서는 1990년대 이후 세계 1위 자리를 내준 뒤 이어진 내수 의존과 선종 편중, 해외투자 실패가 일본 조선업 장기 침체의 구조적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일본 조선업의 특징은 내수 의존이다. 단순히 자국 해운사의 물량에 기대는 수준을 넘어, 표준화된 설계와 자사 사양을 고집하는 보수적 기업문화가 맞물려 글로벌 선주의 요구를 제때 반영하지 못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은 설계 변경과 납기 조정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글로벌 발주 시장을 넓혔다.

그럼에도 일본이 벌크선 등 일부 선종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은 자국 해운 3사(NYK·MOL·K Line)를 중심으로 한 안정적 발주 덕분이다. 일본은 그리스·중국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의 상선 선대를 보유하고 있어, 국내 수요만으로도 일정한 조선 수주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구조가 갈수록 세분화되고 고객 맞춤형으로 진화된 해외 시장에 대응하지 못한 요인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송창현 HD현대중공업 도쿄지사장은 "일본은 자국 표준 설계에 대한 자신감이 강해 선주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 유연하지 못했다"며 "자국 대형 해운사들의 발주가 있어 일본 조선업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조선업의 또 다른 문제는 낮아진 수익성이다. 일본 조선산업을 전문 취재해온 해사신문의 고미 요시노리 기자는 "조선업은 경기와 원가 변동에 민감해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상장사들은 단기 실적 압박 속에 조선 부문을 축소해왔다"고 전했다. 실제 미쓰비시중공업은 조선 부문을 자회사로 분리했으며,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줄고 있다.

▶ 이마바리조선이 건조한 2만TEU급 컨테이너선 '몰 트루스(MOL Truth)'호 전경.ⓒ이마바리조선
▶ 이마바리조선이 건조한 2만TEU급 컨테이너선 '몰 트루스(MOL Truth)'호 전경.ⓒ이마바리조선

산업 구조조정 효과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일본 조선업계 1, 2위인 이마바리조선과 JMU의 통합은 자원 효율화를 통한 생존 전략으로 평가되지만, 시장 점유율 확대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송 지사장은 "일본과 한국은 건조 품질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선종 다변화 없이는 점유율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1조엔 규모의 자금을 투입해 '국유형 조선소' 설립을 검토하는 등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조선업 부흥을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고미 기자 역시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권은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처럼 산업 기반이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친환경 규제에 대응한 신선종 개발 같은 영역에서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했다.

히가키 유키토 일본조선공업회 회장이 내건 '2030년 글로벌 점유율 20%' 목표에 대해서도 업계는 냉정하다. 고미 기자는 "리먼 사태 이전에는 전 세계 건조량이 연간 1억CGT에 달했지만 지금은 6000~7000만CGT 수준"이라며 "선박 교체 주기에 따른 수요가 매년 3천만4천만CGT 정도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회장의 목표는 이 교체 수요를 기반으로 한 계산이지만, 실제 시장 경쟁을 감안하면 달성은 쉽지 않다"며 "업계에서는 희망적 목표로 보는 시각이 많다"고 덧붙였다.

인력난도 일본 조선업이 직면한 구조적 한계다. 기존 도크 설비 등의 전환 활용이 가능하지만 숙련 인력 부족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고미 기자는 "정부가 특정 업종만 지원하기는 어렵고, 인력 부족 문제는 조선업계 전반의 고질적 과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투자 실패 경험도 일본 조선업의 보수적 행보를 강화했다. 2010년대 미쓰비시·가와사키·IHI가 브라질 현지 조선소 투자에서 잇따라 실패한 일은 업계 전반에 '해외투자=리스크'라는 인식을 각인시켰다.

업계는 "기업 입장에서는 주주 반발과 책임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익성이 낮은 해외 투자를 추진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1980년대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시장 논리에 따라 산업이 재편된 경험도 배경으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나서 별도의 수익 보전 장치 없이 개별 기업에 해외 진출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암모니아·수소 등 차세대 연료 연구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액화이산화탄소 운반선 개발을 위한 기업 간 연합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선주의 신뢰는 여전히 한국으로 쏠린다. 송 지사장은 "이중연료 추진선과 LNG·LPG·암모니아 운반선에서 한국 조선소의 실적과 기술력은 압도적"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일본이 내수 중심 구조를 벗어나 적극적인 선종 다변화와 해외 시장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한국·중국과의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고미 기자는 "일본은 세계 3위라는 위상은 유지하겠지만, 1위 복귀는 요원하다. 점유율 방어가 사실상 최대 목표"라고 했다. 반면 국내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친환경·고부가 선종에서 빠른 대응력을 유지하는 것이 시장 우위를 지키는 관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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