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시부터 5시까지 배송을 중단하자” 이 한 문장이 거대한 유통·물류산업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노조가 제안한 ‘새벽배송 금지’ 방안이 그렇다. 명분은 명확하다. 심야 노동에 따른 건강권 침해를 막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실효성은커녕 정작 현장 노동자, 산업계, 소비자 모두에게서 깊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쿠팡 위탁 택배기사 240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93%가 새벽배송 금지에 반대했다고 한다. 이들은 스스로 심야 배송을 선택했고 교통 혼잡이 덜하고 근무 시간 자율성이 높다는 점에서 오히려 선호한다고 답했다.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취지가 현장의 90% 이상이 거부하는 방식으로 실행된다면 과연 그 논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실제로 새벽배송은 단순한 배송 서비스가 아니다. 현재 이용자만 2000만명 이상이다. 15조원 규모로 성장한 이 시장은 식품업계, 소상공인, 농가, 물류 스타트업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는 생활 인프라다. 신선식품 유통 구조와 판매 전략, 심지어 전세버스 기사들의 생계까지 이 시간대에 맞춰 설계돼 있다. 단순히 시간을 금지하는 것으로는 그 생태계를 대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건강권 보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세계보건기구는 야간노동을 2급 발암요인으로 분류했고 관련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과로의 주된 원인은 배송이 아니라 물류센터 내 분류작업에 집중돼 있다는 게 산업재해 통계의 일관된 결과다. 실제로 산업재해의 68%는 분류 과정에서 발생했고 배송 중 사고는 12%에 불과하다.
즉, 문제는 시간대가 아니라 구조다. 인력 부족, 분류 자동화 미비, 교대제 미정비 같은 근본적 요인을 방치한 채 특정 시간만 막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 회피다. 심야 수당 인상, 교대제 개편, 인력 충원 같은 실질적 개선 없이 규제부터 외치는 방식은 정치적 구호일 뿐 산업적 해법이 아니다.
정치권 역시 조심해야 한다. 노동자 보호를 명분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 규제를 일률적으로 밀어붙인다면 복잡하게 얽힌 유통망을 순식간에 마비시킬 수 있으며 산업 신뢰는 물론 정책 신뢰도 함께 무너진다.
결국 새벽배송이라는 시스템 위에 쌓여 있는 수많은 일터와 삶의 구조를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선택지를 없애기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작업을 치밀하게 전개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선식품 중심의 식품업계는 냉장·냉동 배송의 시간 민감성이 절대적인 만큼, 배송 제약은 곧 품질 저하와 매출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커머스 기업뿐 아니라 제품을 공급하는 제조업체와 농가까지 연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벽배송 금지 시 대체 수단이 없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다. 자영업자, 맞벌이 부부, 1인 가구에게 새벽배송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생존형 소비 방식이다. 배송 시간을 제한한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 시간표가 바뀌는 건 아니다. 결국 불편과 혼란은 고스란히 소비자와 현장 노동자의 몫이 된다.
현실을 모르는 규제는 결국, 노동자를 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멈춤’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노동 환경이다.
해법은 있다. 분류 작업 자동화, 야간 수당 현실화, 교대제 개편, 인력 충원 등 제도적 개선을 병행하면 산업과 노동이 공존할 수 있다. 진짜 해법은 선택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조건을 설계해 지속가능한 근무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