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에 본격적인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주요 기업들이 구조조정·사업 재편·M&A(인수합병) 과정에 놓인 가운데 그 중심에는 총수 3·4세로 불리는 ‘상속자들’이 서 있다. 이들의 한마디, 한 번의 투자나 철수 결정은 수만 명의 일자리와 골목상권, 상장사 주주가치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유통가 상속자들] 기획은 유통·식품 기업들의 차세대 경영자를 둘러싼 지분 구조, 직책, 실제 역할과 성과, 향후 승계 시나리오를 면밀히 추적한다. 단순히 ‘누가 후계자인가’를 넘어 한국 유통 산업의 다음 10년을 어떤 전략과 리더십 철학으로 이끌어갈 인물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부사장) [출처=연합]](https://cdn.ebn.co.kr/news/photo/202511/1687473_705740_5139.jpg)
롯데그룹이 3세 경영 승계 수순을 밟고 있는 가운데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이 조용히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그룹 내 ‘미래 성장’을 맡는 실무형 리더이자 동시에 주요 글로벌 프로젝트마다 전면에 나서며 사실상 차기 총수 역할을 수행 중이라는 평가다.
◆‘노무라–컬럼비아–롯데’…父와 닮은 경로·빠른 승진 속도
20일 업계에 따르면 신 부사장은 현재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과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 일본 롯데파이낸셜 대표이사를 겸임하면서 바이오, 금융, 투자 등 그룹 신사업 전반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신 부사장은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신동빈 회장의 장남으로 1986년 부친이 노무라증권 런던지사에 근무하던 시절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아오야마가쿠인 초·중·고를 거쳐 일본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노무라증권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MBA를 수료했다.
‘노무라–컬럼비아–롯데’로 이어지는 경로는 신동빈 회장과 거의 겹친다. 학부만 다를 뿐 금융·글로벌 비즈니스 감각을 체득한 뒤 그룹 경영에 합류하는 ‘2세·3세 공통 코스’를 충실히 밟았다는 평가다. 신 부사장은 지난 2020년 일본 롯데 및 롯데홀딩스 부장으로 그룹 경영수업에 공식 합류했다. 2022년을 기점으로 한국 무대에도 본격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 부사장의 승진 속도는 이례적으로 빠르다.
신 부사장의 경영수업 속도는 재계에서도 이례적으로 빠르다. 2020년 일본 롯데 입사 후 불과 4~5년 만에 부장에서 부사장까지 뛰어올랐다. 실제 지난 2022년 말 롯데케미칼 일본지사 상무로 승진한 데 이어 2023년 6월 롯데파이낸셜 대표이사에 올라서면서 경영 보폭을 넓혔다. 지난해에는 롯데지주 부사장에 오르면서 사실상 매년 한 계단씩 올라섰다.
◆‘은둔형 후계자’에서 현장형 리더로…직접 발로 뛴 글로벌 행보
신 부사장은 재계 안팎의 주목을 받는 3세 경영인이면서도 그간 대외 노출을 꺼리는 태도와 조용한 행보 탓에 ‘은둔형 후계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공식 석상이나 미디어 인터뷰에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경영 보폭 역시 신중하고 차분하게 넓혀온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는 ‘현장 경영’에 방점을 찍고 있다. 연초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인 CES에 참석해 미래 모빌리티 및 AI 기술 동향을 직접 확인했고 곧바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 바이오업계 주요 파트너들과 교류하며 롯데바이오로직스의 글로벌 전략을 뒷받침했다. 6월에는 미국 보스턴을 찾아 바이오산업 최대 행사인 바이오USA에 참가해 글로벌 바이오 네트워크 확장에 힘을 실었다.
8월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현지 롯데리아 매장을 방문해 외식사업의 북미 확장 전략을 직접 챙겼다. 이 밖에도 인도에서는 식품공장 준공식, 싱가포르에서는 유통 매장 개점 행사, 일본과 독일에서는 각각 의료기술 및 의약 전시회를 둘러보며 사업 가능성을 점검하는 등 주요 전략 거점마다 직접 발걸음을 옮기며 현장 중심의 실무형 리더십을 실천해왔다.
신 부사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도 존재한다. 가장 큰 숙제는 ‘지배력’이다. 현재 롯데지주 지분 0.03%를 보유한 소액주주다. 숫자만 보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최근 1년여 동안 장내 매수를 통해 꾸준히 지분을 늘려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지배력 확대·성과 입증 과제…사장 승진 여부 ‘승계 구도 분수령’
지난해 6월 첫 지분 매입 이후 9월, 12월, 그리고 올해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약 5억원 이상을 투입해 지주사 주식을 사들였다. 롯데 특유의 복잡한 지배구조를 감안하면 한국 롯데 계열사들을 직접 거느리는 롯데지주 지분을 서서히 쌓아가는 전략은 향후 승계 구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다른 과제는 ‘경영 능력 입증’이다. 당장 그룹의 양대 주축인 화학과 유통 부문이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는 점은 부담 요인이다. 유가 불확실성과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인한 화학 업황 위축, 온라인 강자와의 경쟁 속에 격화된 오프라인 유통 부문의 실적 부진 등은 신 부사장이 체급을 키울 무대 자체를 제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 부사장이 돌파구로 삼은 것은 신사업이다. 그룹 내 미래성장실을 이끌고 있는 만큼 바이오, 모빌리티, 지속가능성, 뉴라이프 플랫폼 등 4대 신성장 테마를 축으로 신사업 중심의 포트폴리오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인천 송도의 메가플랜트 구축과 북미 CDMO 진출 등 롯데바이오로직스의 글로벌 전략을 진두지휘하면서 실적 창출의 분기점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현 시점 관전포인트는 신 부사장의 사장 승진 여부다. 신 부사장이 지난해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올해 사장 타이틀까지 거머쥔다면 그룹 내에서 차기 총수로서의 입지를 사실상 굳히게 되는 셈이다. 특히 미래 신사업과 글로벌 전략을 전담하고 있는 현재 역할을 고려하면 본격적인 경영 전면 등판을 알리는 ‘분수령 인사’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인사 관련해 정해진 바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