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명나라의 지혜로운 인생 지침서인 채근담(菜根譚)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할 때는 따뜻한 봄바람처럼 온화하고 관대하게, 자신에게는 차가운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고 냉정하게 하라'는 뜻이다.
요즘 대통령 선거 양상을 보노라면 '대인춘풍 지기추상'의 교훈이 무색해진다. 오히려 '대인추상 지기춘풍'(待人秋霜 持己春風)처럼 여겨질 정도로 네거티브 양상이 가열되고 있는 듯하다.
후보들은 상대의 과거 발언과 행보를 문제 삼아 막말과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고, 부정적 프레임을 씌워 물고 늘어지거나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네거티브 공방이 참으로 발칙해 보인다.
선거에서 네거티브 공방은 유권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정치 혐오를 유발하는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항상 공격하는 측에 유리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네거티브에 매달리는지 그저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대인춘풍 지기추상'의 교훈을 되새기며, 네거티브 선거를 불식하고 네거티브에 지친 국민들의 가슴속에 후련한 기운을 불어넣고자 하는 염원으로 아래와 같이 '포지티브 선거'라는 제목의 미니픽션(짧은 소설)을 헌정한다.
* 윤성식 교수는 2011년 계간 '문학의봄'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다.
드디어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다. 동시에 판도라 상자에서 거짓, 비방, 악담, 저주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A 후보가 B 후보를 헐뜯었다.
"군대도 안 갔다 온 무식한 인간은 국방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B 후보도 이에 질세라 A 후보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부정한 세력과 유착된 양아치 같은 자의 행태가 정말 가증스럽습니다!"
두 후보는 곳곳에서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여과 없이 배설했다. 상대 후보의 망언집을 공개하거나 극우 또는 독재 프레임을 씌우는가 하면, 걸핏하면 허위 사실 공표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소∙고발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파리 날리는 식당에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악의적인 목소리만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식당 근처에는 선거 유세의 탈을 쓴 넌덜 나는 소음이 손님 출입을 가로막고 있었다.
후보 간의 네거티브 공세는 그칠 줄 모르고 극단을 향해 치달았다. 심지어 거리에서는 두 후보의 지지자들이 서로 난투극을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국민들은 지역과 이념과 빈부의 양극화도 모자라 정치적 양극화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진저리쳤다. 장기간의 경기 침체와 선거 스트레스는 국민들 가슴속에 속절없이 쌓여만 갔다. 마치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은 만년설처럼.
식당의 메마른 공간과 빈 지갑을 쳐다보니 한숨만 나온다. 가슴이 떨리고 맥박이 빨라진다. 숨 쉬기가 힘들다.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질 것만 같다.
나는 문득 자리를 박차고 분연히 일어났다. 피켓을 챙겨 광화문 거리로 내달렸다. 그런데 피켓을 들고나온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피켓을 든 국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국민들이 외쳤다.
"너무너무 지겹고 넌더리가 나서 못 살겠다! 네거티브 전쟁을 그만두고 당장 포지티브 선거로 전환하라!"
국민들의 거센 시위에 굴복한 정부와 정치 세력은 마침내 모든 선거에서 네거티브를 금지하는 선거 제도를 마련했다.
대통령 선거는 곧바로 포지티브 선거 방식으로 전환됐다. 투표에 의한 득표율뿐만 아니라, 상대방 후보를 존중하고 칭찬하는 정도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포지티브 선거 방식이었다. 즉, 당선자는 득표율 50%와 칭찬지수 50%를 반영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특히 칭찬지수 커트라인 30%를 통과하지 못하면 득표율이 아무리 높더라도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하도록 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개발한 인공지능 로봇이 칭찬지수를 측정했다. 국가 내부통제 원칙에 따라 감사원은 로봇 개발 과정과 칭찬지수 측정 프로세스의 적정성을 검증했다. 국회 감시위원회는 지수 산출의 오류 여부를 이중 삼중으로 감시했다.
인공지능 로봇은 텔레비전, 신문, SNS 등 각종 매체와 선거 현장을 섭렵하여 상대 후보에 대한 칭찬의 양과 질을 측정하고 점수화했다. 심지어 선거 유세하는 후보의 미소와 유머, 겸허한 자세와 잘못에 대한 사과의 진정성까지 측정하여 칭찬지수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네거티브를 포착한 경우에는 이유 불문하고 가차없이 감점 처리했다.
그러자 두 후보는 서로 상대방에 대한 칭찬에 열을 올렸다. 조그마한 칭찬거리라도 수집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상대 후보의 망언집을 페기하고 명언록을 공개하는 등 네거티브 현상을 포지티브로 변환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잘못이 드러난 경우에는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고 즉시 잘못을 인정하고 눈물로 참회하기도 했다. 물론 후보에 관한 사건, 참회, 칭찬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언제나 국민들의 몫이었다.
포지티브 선거가 성실하게 진행되고 후보들의 환한 표정과 미소가 텔레비전 화면을 채울 때마다 국민들의 가슴속 얼음은 서서히 녹고 있었다.
A 후보가 동생에게 욕설한 녹취록이 언론에 공개됐다. B 후보가 자격 미달인 아들을 정치력으로 공기업에 취직시켰다는 채용 비리 정보도 폭로됐다. 두 후보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서로 상대방 후보에게 칭찬 메시지를 띄웠다.
"A 후보가 오죽했으면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 분노와 격한 표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B 후보의 아들이 얼마나 취업하고 싶었으면 그랬을까요? 그 마음 십분 이해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태도에 박수를 보냅니다."
두 후보의 칭찬지수가 올라갔다.
두 후보가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유머를 나눴다.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으면 제가 마돈나가 되겠습니다. 마돈나! 마지막으로 돈 내고 나오겠다는 의미지요. 하하!"
"역시 후보님을 보면 늘 벽을 느낍니다. 완벽! 하하!"
두 후보의 웃음과 유머에 칭찬지수가 또 올라갔다.
대통령 후보들의 포지티브 선거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뇌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동시에 식당도 밝게 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