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오션의 필리조선소 [출처=진명갑 기자]
한화오션의 필리조선소 [출처=진명갑 기자]

한화오션이 미국 본토에 한국 조선 기술을 이식하고 있다.

한때 미국 조선산업 쇠퇴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필라델피아 조선소. 초라한 연간 1.5척의 생산 능력과 낙후된 시설, 오랜 구조조정의 흔적이 남아 있던 이곳에 ‘Hanwha’라는 이름이 걸리면서 조선소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이번 인수는 단순한 회생이 아니다. 한화오션은 이곳을 미국 시장을 겨냥한 생산 거점이자, 그룹의 글로벌 방산 톱10 전략을 뒷받침할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쇠퇴한 미국 조선업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 미 조선 쇠퇴의 풍파를 간직하다

<EBN 산업경제> 취재진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필리조선소를 찾았다.

이곳은 1800년대부터 함정을 건조해 온 미 해군 조선산업의 본거지였다. 냉전 종식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1997년 민간에 매각됐지만, 여전히 미 해군과의 전략적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민간과 군이 맞닿은 중간지대 같은 특수한 성격을 갖고 있다.

입장 절차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권 등록, 보안 서명, 신분 확인, 증명사진 촬영, 그리고 안전모 착용까지. 취재진은 물론 한국에서 파견된 한화 관계자들까지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주황색 바탕에 ‘Hanwha’ 로고가 선명히 박힌 골리앗 크레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크레인 아래로 향하는 길목엔 쇠락한 미국 조선 산업 풍파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희미하게 바랜 차도 라인, 울퉁불퉁하게 패인 도로, 군데군데 부서진 콘크리트 위에는 각종 철제 자재와 장비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중장비의 진입로로 쓰이던 길목은 적재물로 일부가 막혀 있었고, 곳곳에서 노후 설비의 흔적이 느껴졌다. 한국의 대형 조선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효율성’이 크게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재건의 바람’이 느껴졌다.

골리앗 크레인 아래선 작업자들이 측량기를 들고 바닥에 선을 긋고 있었고, 자재를 옮기는 중장비도 분주히 오갔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이 구역엔 블록 조립 공장과 자동화 설비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생산성 향상의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 쇠락한 조선소의 풍이지만, 한쪽 도크에는 최근 진수를 마친 미 해군의 NSMV(National Security Multi-mission Vessel) 한 척이 진수를 마치고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한화는 지난해 12월 이 조선소를 인수한 뒤 곧바로 현황 분석에 착수했고, 한국 본사 인력들을 파견해 현장 체계 재정비에 돌입했다.

현장은 아직 ‘완성된 경쟁력’은 아니었지만, 멈춰 있던 도크에 다시 사람과 기술, 자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만으로도 이곳은 더 이상 쇠퇴의 끝이 아닌 ‘재건의 출발점’이었다.

한화 필리조선소 내부 [출처=진명갑 기자]
한화 필리조선소 내부 [출처=진명갑 기자]

■ 건조 능력 1.5척→8척, K-조선 시스템 이식 중

현재 필리조선소의 연간 선박 건조 능력은 1.5척. 조선소 자체 수익성만 놓고 보면 운영 가치가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화오션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도 바로 이 ‘생산성 재건’이다. 중기적으로 연간 8척 수준까지 건조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 목표다.

이를 위해 도크 재정비 작업이 한창이다. 필리조선소는 총 2기의 도크를 보유하고 있지만, 현재 사용 가능한 곳은 한 곳뿐. 나머지 도크는 노후화로 활용이 불가능했으나, 현재 전면 리모델링을 통해 양 도크 동시 가동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생산 공정도 K-조선식으로 개편 중이다. 블록 조립 기반 모듈화 시스템, 자동 용접 설비 등 한국 조선소에서 축적된 기술을 현지에 적용할 예정이다.

인력 구성도 변하한다. 현재 약 1500명 규모의 인력을 3000명 이상으로 두 배 확대할 계획이다. 단순한 채용이 아닌 교육 중심의 체질 전환이다. 한국 본사에서 파견된 기술진이 현지 직원들과 함께 작업하며 K-조선식 공정관리·품질관리 노하우를 직접 전수하고 있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정확한 시점을 단정하긴 어렵지만, 5년 안에 연가 8척 건조 능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한화 필리조선소 [출처=진명갑 기자]
한화 필리조선소 [출처=진명갑 기자]

■ 고부가가치 수주도 본격화…LNG선 건조 확정

물량 확대에 이어 고부가가치 선박 수주도 시작됐다.

최근 한화오션은 3480억원 규모의 LNG운반선 선조 계약을 체결했다. 해당 선박은 필리조선소에서 건조되며, 2028년 1월 31일 인도될 예정이다. 옵션 계약에 따라 추가 1척이 건조될 가능성도 있다.

이번 계약은 단순 수주를 넘어 북미 LNG운반선 시장에서의 기술력 검증과 주도권 확보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K-조선이 미국 시장 안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내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한화필리십야드는 미국에서 존스법 대상 대형 상업용 선박의 절반 이상을 건조해 온 중추적인 조선소”라며 “이번 프로젝트는 LNG운반선이라는 고난도 선박 분야로의 확장을 통해 한화필리십야드의 기술적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동시에 한화오션의 글로벌 기술력을 미국 조선업에 접목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현장 취재를 통해 확인한 필리조선소는 아직 완성된 경쟁력은 아니다. 그러나 설비와 인력, 시스템, 그리고 시장까지 네 박자를 갖춘 ‘잠재력의 집합체’였다. 낡은 부두 사이로 움직이기 시작한 새로운 설비와 사람들. 현장에 뿌리내리는 기술과 투자, 그리고 이어질 수주들은 조선소의 정체성을 바꾸고 있다.

이곳은 더 이상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K-조선과 미국의 해양 전략이 교차하는 최전선, 그리고 ‘한국의 조선 기술이 미국의 바다를 다시 움직인다’는 새로운 산업 서사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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