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형 생활산업부 기자
이윤형 생활산업부 기자

최근 패션업계에서 '새깅(Sagging)'이 다시 뜨겁다. 

80-90 미국 힙합 문화에서 억압적인 복장 규범에 대한 저항과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출발한 새깅이 오늘날에는 자유와 개성을 넘어 정체성과 젠더 감수성까지 담아내는 현대적 패션으로 재해석되면서다.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내려 속옷을 드러내는 이 스타일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사회적 맥락과 역사를 품고 있다.

새깅의 기원은 미국 교도소에 있다. 수감자들의 체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제공되는 큰 사이즈의 수용복, 자살 방지를 위한 벨트 착용 금지 등의 환경이 자연스레 바지를 엉덩이에 걸치는 착용 방식으로 이어졌다. 일부 수용자들은 이를 '교도소 출신'임을 상징하는 스타일로 출소 이후에도 유지했고 이는 힙합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며 반항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패션으로 확산됐다.

이런 맥락은 K팝 스타들의 무대에서도 이어진다. 새깅은 개성과 매력을 드러내는 연출로 환호를 받는다. 이들의 새깅은 콘셉트이자 무대 위 자기표현의 미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최근 새깅에서 일부만 차용된 듯한 장면이 예상 밖의 장소에서 연출됐다. 패션쇼나 무대도 아닌 법 집행 현장. 그것도 전직 대통령의 이름과 함께였다. 

지난 1일 김건희 특검팀은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하려 했지만 그의 물리적 저항에 부딪혀 중단됐다. 특검팀에 따르면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수의도 입지 않은 채 팬티와 민소매 차림으로 구치소 바닥에 누워 체포에 저항했다. 

반나체 패션은 '새깅'이 될 수 없지만 팬티로 저항한 것은 분명하다. '윤석열식 새깅'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점은 억압적인 규범에 맞선 저항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뭉개기 위해 체면도 집어던진 몸부림이었다는 것이다. 법적 절차를 무력화하려는 의도적 방해였다는 점에서 스타일이 아니라 범법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측근들은 '체온 조절'을 운운했지만 국민들이 본 건 '온도'가 아니라 '태도'였다.

새깅이 패션이 될 수 있는 건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사회와 대중에게 설득력을 가질 때다. 힙합 뮤지션들의 새깅은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이었고 K팝 스타들의 새깅은 무대 콘셉트와 어우러진 연출이었다. 각각에는 최소한의 미학과 철학이 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의 속옷 차림은 그 어떤 서사도 철학도 스타일링의 맥락도 없었다. 그것은 저항이 아닌 회피였고 자기표현이 아닌 자기보호였다. 같은 '바지 내리기'라도 하나는 패션이었고 다른 하나는 몰락이었다.

그날 바지 대신 내려간 것은 스타일링이 아니라 전직 대통령의 품위였고 노출된 것은 패션이 아니라 법치주의를 향한 조롱이었다. 

역사는 복장을 통해 권력을 표현해왔다. 간디의 도티(인도 전통의상)는 식민지배에 대한 부정이었고, 카스트로의 야전복은 혁명의 상징이었다. 한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의 노타이는 권위의 넥을 풀었고 이명박의 작업복은 행정의 바닥을 짚었다. 

공인의 옷차림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메시지로 사용된다. 특히 정치인에게 옷차림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어떤 가치를 강조할지를 선택하는 무형의 언어다. 

그런 점에서 공인이자 최고권력자였던 윤 전 대통령이 법 앞에서 보여준 태도는 품격의 언어가 아니었다. 구치소 바닥 위 사각팬티는 자유와 저항이 아니라 부패와 남루한 자기방어였다. 

이날 이후로 새깅은 패션계에선 유행을, 대중문화에선 개성을, 정치에선 몰락을 상징하게 됐다. 그가 시대에 남긴 마지막 복장은 명품 수트가 아닌 구치소 바닥의 사각팬티가 될지도 모른다.

법치주의는 절차와 상징으로 신뢰를 쌓는다. 그 절차가 훼손되는 순간 국민이 느끼는 것은 단순한 실망이 아니라 피로와 분노다. 이번 '나체 새깅'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권위와 책임을 스스로 내던진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패션은 때로 저항이 되고,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법의 현장에서 '윤석열식 새깅'은 저항이 아니라 퇴행이었고 메시지가 아니라 변명에 불과했다. 새깅의 유행이 돌아왔다지만 적어도 구치소에서 벌어진 새깅은 시대를 앞서 간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렀다.

사각팬티 속에 숨긴 건 자유가 아니라 패배감이었고 저항이 아니라 체면치레였다. 이 장면은 패션사가 아닌 정치사에 '사각팬티 정치'라는 부끄러운 각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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