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밥상이 가정간편식(HMR)으로 바뀌는 현상은 단순한 편의 추구를 넘어선다. 고물가·고령화·맞벌이 확대라는 사회 구조적 배경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제수 음식의 경우 ‘정성’이라는 상징성이 강했지만 이제는 ‘효율’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이를 대체하고 있다. [출처=오픈 AI]
명절 밥상이 가정간편식(HMR)으로 바뀌는 현상은 단순한 편의 추구를 넘어선다. 고물가·고령화·맞벌이 확대라는 사회 구조적 배경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제수 음식의 경우 ‘정성’이라는 상징성이 강했지만 이제는 ‘효율’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이를 대체하고 있다. [출처=오픈 AI]

추석 차례상이 변하고 있다. 부모 세대가 손수 전을 부치고 잡채를 무쳐 올리던 전통적 방식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대신 전·잡채·떡갈비 같은 대표 제사 음식들이 가정간편식(HMR)과 밀키트로 대체되며, 명절 문화 자체가 ‘간소화·효율화’라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19일 한국물가협회 조사에 따르면, 올해 추석 차례상 비용은 전통시장 평균 28만4010원, 대형마트 평균 37만3540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보다 1.1% 낮아졌지만 최근 10년간 31.5% 상승했다.

이는 여전히 가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식재료를 일일이 장만해 조리하는 수고와 비용을 고려했을 때 소비자들은 점점 ‘정성=손맛’이라는 전통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있다.

풀무원은 냉동전과 동그랑땡 완자 판매량이 지난 설 기준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었고,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떡갈비·너비아니’ 역시 같은 기간 약 9% 매출 증가를 기록했다. 오뚜기는 이번 추석을 앞두고 ‘옛날잡채’ 냉동 제품을 선보이며 시장을 정조준했다.

단순히 시간을 줄여주는 제품을 넘어 전통 조리법과 현대적인 레시피를 접목한 ‘프리미엄 HMR’로 진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유통 채널의 데이터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이마트의 ‘피코크 간편 차례상’ 매출은 지난 2022년 추석 대비 2023년 추석에 35% 증가했고, 지난해에도 전년 동기 대비 23% 늘었다.

특히 제수 음식 세트는 가족 단위 소비자가 가장 많이 찾는 상품군으로 굳어졌다.

MZ세대와 기성세대 간 ‘명절 음식’에 대한 인식 차이도 뚜렷하다.

MZ세대는 ‘차례상 간소화’에 적극적이다. 전통적 의미보다는 실용성과 효율성을 우선시해 간편식을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기성세대 역시 점차 태도를 바꾸고 있다. 고령층은 “손수 요리하는 게 힘들다”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는 판단으로 HMR을 찾는다.

결과적으로 세대 간 합의점을 만들어내며 HMR은 ‘부득이한 대안’에서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를 바꿔가고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김주영씨는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건 좋지만 음식 준비는 항상 스트레스였다”며 “이번 추석엔 냉동전과 밀키트 떡갈비를 주문해 간단하게 차리기로 했다. 오히려 맛도 일정하고 편하다”고 말했다.

60대 주부 오정혜씨는 “처음엔 간편식으로 차례상을 차린다는 게 낯설었지만 해보니 손도 덜 가고 맛도 괜찮아 이젠 자주 활용한다”며 “예전처럼 힘들게 전 부치지 않아도 돼서 명절이 덜 버겁다”고 밝혔다.

대형마트 현장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이마트 관계자는 “피코크 간편 제수 음식 세트는 명절 시즌마다 가장 먼저 품절되는 상품군 중 하나”라며 “특히 3~4인 가족 단위 소비자가 많이 찾고 있으며, 매출이 해마다 두 자릿수 이상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도 “명절 음식의 노동 강도가 워낙 높고, 간편식과 원재료 직접 구매의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며 “소비자들이 간편식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편의 추구가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업계에 이번 변화는 단순한 매출 호재를 넘어 구조적 성장 기회다. 매년 반복되는 명절 특수는 안정적인 매출원 역할을 하며, 세대별·가족형태별 소비 성향에 따라 제품군을 세분화할 수 있다.

실제로 기업들은 밀키트 기반의 ‘프리미엄 제수 음식 세트’, 냉동·냉장 HMR 전용 패키지, 1인 가구를 위한 소포장 제수 메뉴 등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식품업계 브랜드 충성도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한 식품산업 연구원은 “명절이 되면 자동적으로 특정 브랜드 제품을 찾는 소비 습관이 형성될 수 있다”며 “이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고정 수요층을 만드는 효과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차례상 간편화는 단순히 일시적 소비 패턴이 아니다. 사회 전반의 생활 양식 변화, 인구 구조, 노동 강도, 비용 문제 등이 맞물린 결과로 명절 간편식은 앞으로도 ‘새로운 전통’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는 “명절 음식 공유 문화와 간소화 트렌드가 확산되는 만큼 식품사들이 차례상 간편식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명절은 더 이상 ‘부담’이 아닌 ‘즐기는 축제’로 변모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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