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 루신감옥 [출처= EBN 김남희 기자 ]
대련 루신감옥 [출처= EBN 김남희 기자 ]

[편집자주] 전승절 행사에서 북·중·러가 단결을 모색하는 동안 이재명 정부는 ‘페이스 메이커론’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공조를 시사했다. 남북한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펼쳐질까. 전문가들은 남북 간 최소한의 소통 채널만큼은 복원돼야 한다고 분석한다. 북·중·러의 결속이 표명되면서 국제사회 시선은 한반도를 향했다. 이재명 정부가 실용주의를 내세워 남북한 대화·협력을 개선하겠다고 해서 기대감이 작동하고 있어서다. EBN은 북한과 중국 및 러시아 국경 탐사를 통해 이재명 정부가 직면하게 될 북한과의 관계를 그려보고자 이번 기획을 준비했다.

EBN은 북한과 중국 및 러시아 국경 탐사를 통해 이재명 정부가 직면하게 될 북한과의 관계를 그려보고자 한다. [출처=EBN 김남희 기자 ]
EBN은 북한과 중국 및 러시아 국경 탐사를 통해 이재명 정부가 직면하게 될 북한과의 관계를 그려보고자 한다.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대련(중국)=김남희 기자] 중국 요녕(랴오닝)성 대련(다롄)은 한때 러시아·일본 제국의 요충지이자 근대 동북아 격동을 품은 항구 도시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에서 압승하면서 대련을 손쉽게 꿰찼다. 러일전쟁은 한민족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했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집어삼켰다.

오늘날 이곳에는 한국인에 두 개의 역사적 장소가 남아 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루신감옥(旅順監獄:여순감옥)과 관련 재판소가 꼬박 116년 넘게 자리하고 있다. 안 의사를 기리는 한국인 방문객들이 많은 이유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 챗GPT 생성 이미지.[출처=오픈AI]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 챗GPT 생성 이미지.[출처=오픈AI]

안 의사의 하얼빈에서의 저격이 무장 항일투쟁 상징이었다면, 대련 루신감옥은 안 의사의 신념과 정신의 상징이다. 안 의사 순국 후에도 그의 뜻은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광복군 결성 등으로 이어졌다. 우리 일행이 조선·중국 국경(압록강~두만강:1311km)을 탐방 가기 전 루신감옥을 방문한 이유다.

대련은 한국과 중국이 함께 일본에 저항한 공동의 도시로 역할을 하고 있어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특히 루신감옥은 중국 혁명가 쑨원(孫文)이 안 의사를 위해 발문을 썼고, 혁명 사상가 장타이옌(章太炎)이 "아시아 최고의 의로운 협객(亞洲第一義俠)"이라고 칭송했다고 소개했다. 안내인은 "안중근 의사는 중국에서 더 추앙받는 인물이며 하얼빈 저격 장소도 역사적 장소로 기리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EBN 김남희 기자 ]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대련에 도착하면서 떠오른 책이 있다.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이다. 소설은 안중근이 이토 암살까지 치열했던 일주일을 담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기자에게 대련은 그저 압록강을 보기 위한 첫 시작점에 불과했을 것이다.

소설은 안중근과 이토가 각자 동해와 서해권을 끼고 중국 만주로 다가오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두 사람의 교집합은 하얼빈이다.

이토는 통치 중인 만주 내방을 이유로 일본에서 서해를 건너 하얼빈으로 왔고, 안 의사는 평양 인근 신남포에서 출발해 부산에서 러시아행 기차를 타 하얼빈에 도착한다. 당시는 부산에서 기차로 러시아에 갈 수 있었던 유라시아 대륙 시대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이동 경로  [출처=하얼빈 ]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이동 경로  [출처=하얼빈 ]

두 사람의 목적지는 같았지만 끝은 달랐다. 소설은 안 의사의 동방 평화를, 일본의 동북아 제국주의를 뜨겁게 대조시킨다. 그 두 개의 불꽃은 하얼빈에서 만났고, 불꽃 하나는 총탄에 쓰러졌다.

당시 안 의사는 분초 단위로 의거를 준비했다. 소설에서나, 상황적으로나 한국인으로선 이른바 '하늘이 허락한 거사'가 아니었을까. 이토의 얼굴을 신문으로만 봤던 안 의사는 저격 장소에서 이토의 실물을 바로 알아볼 가능성이 낮았다.

더 큰 문제는 사격거리였다. 안 의사의 M1900권총은 유효 사거리가 짧고 살상력이 모자랐다. 바짝 다가서야 그나마 급소를 맞힐 수가 있었다. 하얼빈이 러시아령이었던 만큼 덩치 큰 러시아 헌병대 사이의 이토를 찾아내 총격하는 것 자체가 난도 높았다. 이토를 죽이지 못하면 한반도는 더 큰 비극을 자초할 수도 있었다. 안 의사는 '내가 살아서 이토를 쏘는 구나'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안중근이 가진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토가 탄 열차가 플랫폼 어느 지점에서 정차할 것인지도 몰랐다. 열차가 도착했을 때 러시아 경비대, 청나라 경비대의 포진 위치도 짐작할 수 없었다. 안 의사는 총 8발(탄창 7발·약실 1발)을 장전했고, 그 중 7발을 발사했다.

루신감옥 고문실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루신감옥 고문실 [출처=EBN 김남희 기자 ]

안 의사는 이토 가슴 등에 3발을 명중시켰고, 이중 1발은 이토의 폐 속을 파고들어갔다. 나머지 총알은 양 옆의 수행비서를 향했다. 소설은 '총알이 이토에 들어가는 순간 안중근의 목숨이 이토에 명중했다'고 묘사했다.

러시아는 일본에 안중근을 넘겼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러시아 지방법원 관사는 '안중근이 한국 신민이므로 이 사건의 재판 관할권은 러시아에 속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결정은 신속하게 처리됐다. 러시아는 사건에서 손을 뗐고 안중근은 일본 관할인 대련으로 이송됐다. 대련은 하얼빈에서 930km 떨어져 있다. 안중근 등 몇몇 혐의자들을 태운 남만주철도는 며칠 밤낮 대륙을 달렸다. 세계적인 암살 뉴스였다.

[출처=EBN 김남희 기자 ]
[출처=EBN 김남희 기자 ]

일본은 안중근을 한낱 불만 많은 불량배로 치부하려 했지만 안중근은 의연하게 받아쳤다. 안중근이 하얼빈 현장에 잡혔을 때 외친 '코레아 우레(대한민국 만세)'는 입소문을 타고 전세계로 번졌다.

안중근은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고 외쳤다. 조·중·러·일 방청객들이 수근 거렸다. 세계 전역으로 기사가 퍼져 나갔다.

루신감옥 감방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루신감옥 감방 [출처=EBN 김남희 기자 ]

소설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공개석상에서 말하기 위해 이토를 죽였음을 알린다. 죄목은 이렇다. △명성황후 시해죄(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황제 폐위죄(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조약 강제 체결죄(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등 각종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사람 학살죄( 수많은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군대 해산죄(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국권 강탈죄(한국 정부의 권리를 빼앗은 죄). 이외 △철도·광산·산림, 강 독점죄(철도·광산·산림·강을 강제로 빼앗아 독점한 죄) △제일은행권 강제 통용죄(제일은행 발행 지폐를 강제로 유통시킨 죄) △국고 착복죄(대한제국 국고를 착복한 죄) △동양 평화 교란죄(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황 기만죄(일본 천황을 속여 동양 평화에 반하는 정책을 펼치도록 한 죄) △한일 관계 이간죄(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죄) △정치범 감금죄(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박해하고 감금한 죄) △한국 교육 방해죄(한국의 교육을 가로막은 죄) △한국인의 외국 유학 금지죄(한국인들의 해외 유학을 금지시킨 죄).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이처럼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하고 동양 평화를 위협한 원흉이므로 처단했다고 했다.

루신감옥 사형장 [출처= EBN 김남희 기자 ]
루신감옥 사형장 [출처= EBN 김남희 기자 ]

소설에 따르면 안중근은 "이같은 이유로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토를 저격한 것은 나라 대 나라 간의 전쟁임을 강조했다.

1910년 2월14일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루신감옥에서 형이 집행됐다. 안중근 가족들이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일본은 시신을 대나무통에 담아 공동묘지에 묻었다.

역사가들은 일본은 안 의사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해를 가족에게 인계하지 않았으며, 정확한 매장지를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안 의사 유해 찾기는 116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루신감독 사형수 매장 방식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루신감독 사형수 매장 방식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루신감옥과 재판소 모두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현재 한국의 고시원 1~2인실 크기 만한 감옥엔 6~8명이 수감됐고, 고문이 행해지던 처참한 방은 누군가의 비명이 새어나고 있는 듯 했다.

죄질에 따라 크기가 다른 밥그릇이 제공됐고 수감자는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가혹한 노동에 처했다. 사형장의 스산함을 보자 우리 일행들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재판소에서는 심지어 고문을 재현하며 당시의 엄혹한 시대상을 보여줬다.

모든 종류의 전쟁은 잔인하다. 전쟁은 인류에게 고통과 파괴를 가져오므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특히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상대를 섬멸하는 압승을 추구한 이유는 자명해보인다.

남김없이 멸망시키는 승리야 말로 제3국의 개입을 차단하기가 쉽고 새로운 판도를 정립시키기 쉬워서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일본이 선진 무기를 앞세워 청나라 및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를 이룬 뒤 한반도를 식민화한 이유다.

대련 루신감옥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대련 루신감옥 [출처=EBN 김남희 기자 ]

당시 일본은 요동반도를 점령하며 동아시아 제패를 향해 맹렬히 달렸다. 하지만 루신감옥의 차가운 벽돌과 좁은 독방은 안중근 의사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그는 수감 중에도 ‘동양평화론’ 집필을 시작하며 사상가·독립운동가로 거듭나는 모습을 남겼다. 32세의 청년 혁명가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남겼다. 그의 미완의 책을 누가 대신 이어갈까.

일본 사람들과 일본 역사 안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다. 이런 배경에는 이토 자신의 능력과 식견에 대한 자신감이 자리한다. 일찍이 1863년 22세 때 영국으로 가 서양학문을 습득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미국으로 파견되어 화폐제도, 은행제도를 조사해 귀국 후 일본의 금융제도를 설계했으며 1882년에는 정부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입헌제도조사를 위해 직접 유럽에 장기간 머물기도 했다.

그러한 지식을 자산으로 삼아 다른 관료들을 압도하며 지도자의 위치를 굳혀나갔다. 특히 영어실력이 뛰어나 국제정세도 민첩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 [출처=연합뉴스 ]
이토 히로부미 [출처=연합뉴스 ]

안중근과 이토는 모두 동양 평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척점에 서 있다. 안중근은 한·중·일이 손잡고 서양에 대응하자는 동양평화를 주장했다. 이토는 일본제국이 동아시아를 점령하는 통일제국을 꿈꿨다.

일부에선 가톨릭 신자이자 ‘동양 평화를 원하던’ 안중근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토를 총살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자신들이 보호해주겠다는 이유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토에 대해 "대륙으로 팽창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기본적으로 지지하였으며, 통감으로서 한국의 식민지배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설명했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에 의해 격랑의 파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혹자는 "유럽에서는 독일이 강해지면 평화가 깨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약해질 때 평화가 깨졌다"고 진단했다.

[출처= EBN 김남희 기자]
[출처= EBN 김남희 기자]
[출처= EBN 김남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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