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실리 라 몰리사나 공장에서 한 직원이 파스타 포장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출처=월스트리트저널]
푸실리 라 몰리사나 공장에서 한 직원이 파스타 포장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출처=월스트리트저널]

이탈리아 대표 수출품인 파스타가 미국 시장에서 자취를 감출 위기에 놓였다. 미국 상무부가 이탈리아 주요 파스타 제조업체들에 최대 107%의 복합 관세(반덤핑 관세 92%+EU 수입관세 15%)를 예비 부과하면서 현지 기업들이 사실상 수출 중단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탈리아 남부 캄포바소에 본사를 둔 라 몰리사나(La Molisana)의 주세페 페로(Giuseppe Ferro) 최고경영자는 "미국은 매우 중요한 시장이지만, 이런 수준의 관세를 감당할 마진은 없다"며 "내년 1월부터 미국 시장 철수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미 상무부는 라 몰리사나를 포함한 13개 이탈리아 기업의 파스타 제품이 미국 내에서 '덤핑 판매'되고 있다며 92%의 반덤핑 관세를 예비 부과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EU 수입품 15% 관세가 더해져 총 107%에 달하는 고율의 부담이 발생한다.

이번 조치는 1990년대 이후 반복돼온 반덤핑 조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준이다. 그동안 이탈리아 업체들은 소액의 벌금을 '미국 시장 진입비용'으로 감수했지만 이번만큼은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라 몰리사나의 공장에는 약 350명이 근무하며, 지역 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페로 CEO는 "미국 수출이 회사 성장의 핵심이었다"며 "이번 조치는 이탈리아 지역사회에도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업계와 정부는 이번 관세 결정이 단순한 가격조사 결과라기보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라 몰리사나와 루모(Rummo) 등 일부 업체들은 “이번 조치는 덤핑 방지 명분 아래 수입 자체를 제한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럽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이미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등 유럽연합(EU)을 '미국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비판해왔다. 이탈리아 외무장관 안토니오 타야니는 "이탈리아의 상징 산업이 위협받고 있다"며 외교적 대응팀을 꾸리고 미국 측과 협상에 나섰다.

EU 집행위원회 통상 담당 마로스 셰프초비치도 "107%의 복합 관세는 명백히 수용 불가능하다"며 미 상무부에 항의했다.

이번 반덤핑 조사의 배경에는 미국 내 주요 파스타 제조사들의 불만이 자리한다. 미국의 8th Avenue Food & Provisions('론조니' 브랜드 보유사)와 윈랜드 푸드('뮤엘러스' '프린스' 브랜드 보유사)가 이탈리아산 파스타의 덤핑을 주장하며 제소한 것이다.

특히 윈랜드 푸드는 이탈리아 사모펀드 인베스티인더스트리얼(Investindustrial)이 소유한 기업으로, 이 그룹은 이탈리아 내 식품회사 라 도리아(La Doria)와 고급 식품 체인 이털리(Eataly), 파스타 제조사 파스티피치오 디 마르티노(Pastificio Di Martino)를 보유하고 있다.

이 세 곳은 이번 제재 대상에서 제외돼, 경쟁사들이 철수할 경우 미국 시장에서 반사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파스티피치오 리구오리(Pastificio Liguori)의 파스콸레 카실로는 "우리 제품은 이탈리아보다 미국에서 훨씬 비싸게 팔린다"며 "덤핑이라는 판단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현재 미 상무부의 관세 부과는 예비 단계이지만, 미국 유통업체들 역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페로 CEO는 "미국 거래처들이 '문제 있는 공급사'로 낙인찍힐 것을 우려하고 있다”며 “이들이 계약을 중단하면 이미 시장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상무부는 "이번 조치는 단순 기술적 검토 과정일 뿐"이라며 "최종 판정 전까지 기업들이 소명할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며 외교적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미·이탈리아 양국 간 경제 협력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이탈리아는 파스타 수출의 약 15%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연간 약 7억7000만 달러 규모의 시장을 상실할 경우 생산, 고용, 지역경제 전반에 충격이 예상된다.

업계 전문가들은 "관세가 최종 확정되면 이탈리아산 파스타의 미국 내 공급이 급감하고, 현지 대체 제품이 빠르게 시장을 점유할 것"이라며 "결국 소비자 가격 상승과 품질 저하가 동시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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