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투자업계가 퇴직연금 시장을 두고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이달 말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인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로 ‘머니무브’가 이뤄질 것을 기대하는가 하면,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 운용자 참여 가능성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퇴직연금 실물이전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기존 운용상품을 매도(해지)하지 않고 퇴직연금 사업자만 바꿔 이전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동안 퇴직연금 계좌를 타 사업자로 이전하려면 기존 상품의 해지(현금화)에 따른 비용(중도해지 금리 등), 펀드 환매 후 재매수 과정에서 금융시장 상황 변화로 인한 손실(기회비용) 등이 발생해 퇴직연금 사업자 이전이 쉽지 않았습니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로 사업자 간 경쟁이 촉진돼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됩니다.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382조원으로 5년 사이에 두 배 가량 증가했습니다. 이 중 예·적금과 같은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이 높은 DB형 적립금 비중은 감소세인 반면, 실적배당형 상품을 중심으로 DC형·IRP 적립금 비중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이 결과 수익률도 크게 변화하는 모습입니다. 원리금보장상품 위주의 운용으로 퇴직연금 시장 수익률은 2% 초반대에 그쳤지만, 지난해에 5.26%로 상승했습니다. 아직 DB형에서 DC형이나 IRP로 이전이 가능하지 않지만, 당국도 점차 이전 범위를 확대해 나갈 방침인 만큼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적극적으로 퇴직연금 시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퇴직연금 실물이전을 앞두고 증권사들은 앞다퉈 관련 이벤트를 실시해 모객에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국민연금공단입니다. 지난 8월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공단이 100인 초과 사업장 대상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 것입니다. 여당에서도 연금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에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도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검토를 언급해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 시장 진출 가능성은 높아졌습니다.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시장 사업자로 참여하게 되면 국민연금공단으로 대규모 자금 이동이 예상됩니다. 퇴직연금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이 2%대인 반면 국민연금기금 수익률은 7%에 근접하기 때문입니다. 퇴직연금 가입자 입장에서 개별 퇴직연금 상품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서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국민연금 운용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금융투자협회는 은행연합회·생명보험협회·손해보험협회와 정부부처에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사업자 참여 반대 공동 대응에 나섰습니다.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은 “공적 영역 섹터가 프라이빗쪽으로 넘어오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한다”며 “국민연금의 모수개혁과 수익률 개선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제일 우선이 돼야 하는데 그것을 뒤로 하고 퇴직연금 시장까지 참여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됐다”고 언급했습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 수익률이 그대로 퇴직연금 수익률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지급 시기와 그 규모가 정해져 있지만 퇴직연금은 연금 수령 시점이나 인출 방식 등을 가입자가 결정하기 때문에 운용 방식에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국민연금이 퇴직연금이라는 사적 시장에 뛰어들면서 한국 자본시장이 국가가 운용하는 시장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국민의 노후자산 증식을 위해 정부가 세제 혜택, 제도 개편 등으로 금융투자자산 확대를 유도하고 있는 상황인데,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에 들어오면 오히려 민간 사업자들의 입지는 필연적으로 좁아지고 역량도 저하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