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사진=김태준 기자 ]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사진=김태준 기자 ]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前 7선 국회의원)은 범현대가 큰 어른이다. 그의 장남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에 대해 학점을 준다면?. 13여 년간(1975년 현대그룹 공채 입사) 회사를 경영한 선배 입장일까. 아니면 부자지간의 관계일까.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지 궁금하다. 하지만 공정한 점수를 매기기 어렵다. 정 이사장이 평가하는 공정성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정몽준 이사장은 지난달 15일 경기도 하남시 인근에서 고(故)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 24주기 선영 자리에서 "(정기선 부회장이) 세계적으로 HD현대의 입지를 강화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EBN 산업경제〉 취재진의 구체적인 점수 질문에 대해 "그냥 넘어가시죠. 어떻게 점수로 평가하나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어 "이젠 회사와 무관한 사람이라서 (회사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며 "(정기선 수석부회장은)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 이사장은 우회적으로 정기선 수석부회장의 활발한 글로벌 경영 행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서른 살의 정몽준 현대중공업 사장 [출처=HD현대]
서른 살의 정몽준 현대중공업 사장 [출처=HD현대]

정 이사장은 세월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검은색 정장, 흰색 와이셔츠 그리고 아웃도어 외투를 착용했다. 혹시 모를 우천에 대비해 선택한 것. 하지만 이 옷은 적어도 10년은 족히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의 흔적을 말해주듯 그의 아웃도어 자켓의 색감은 빛이 바랬다. 이미 방수기능도 제 역할을 못 할 것 같다. 

그의 검소함은 구두에서도 나타난다. 뒤축이 닮고 해어진 검은색 계열 '로퍼(묶는 끈이 없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다. 정몽준 이사장은 HD현대 최대 주주로 약 2조원의 자산가다. 그런 그는 검소함의 대명사로 꼽힌다. 이러한 소박함은 정주영 명예회장과 변중석 여사와 맞닿아 있다. 아산은 그랬다. 입고 다니는 옷은 춘추복 한 벌. 겨울에는 양복 안에 내의를 입고, 등산 바지는 재봉틀로 깁고 기운 지게꾼 바지와 다름없다는 게 현대그룹 전(前) 고위 관계자의 증언이다.

이뿐만 아니라 구두가 닳는 것을 막으려고 굽에 징을 박아 신고 다녔고, 계속 굽을 갈아가며 세 켤레의 구두를 30년 넘게 신었다. 이러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근검 정신을 정 이사장이 물려받았다.

정 이사장은 공공연한 자리에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버지였다"라며 "커다란 열정을 가진 분으로 그 열정은 타인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타오르면서 자신을 밀고 가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과 무릎에 앉은 아들 정몽준, (사진 오른쪽)형 정몽헌 회장과 변중석 여사 [출처=HD현대]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과 무릎에 앉은 아들 정몽준, (사진 오른쪽)형 정몽헌 회장과 변중석 여사 [출처=HD현대]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도 자신의 삶을 '근면·검소·친애'로 정의했다. 정 명예회장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자신은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나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일생은 기능공, 근로자들과 함께한 세월이다"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 삶의 좌우명인 '근면·검소·친애'는 현재 HD현대(옛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건설뿐만 아니라 '범(凡)현대가' 전 사무실에 걸려 있다고 현직 현대차그룹 계열사 임원의 증언이다.

변중석 여사는 평생 화장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변 여사는 평생 일하기 편한 옷인 통바지를 착용했고, 대외적으로 보이기 불편한 외부 손님이 오면 스웨터를 꺼내 입고, 겨울에는 낡고 오래된 외투를 입을 정도 정도로 검소했다. 변 여사는 현대그룹이라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기업 총수의 가족임에도 조용한 내조자로서 평생을 살았다. 오죽했으면 외부에서 변 여사를 면전에 "현대(現代) 사모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물어볼 정도로 소탈한 삶을 영위했다.

정몽준 이사장은 의외로 손이 크다. 가족에 대한 일에 적극적이다. 2023년 그는 조카 정대선 씨에게 100억원을 건넸다. 큰돈이다. 전액 모두 정 이사장의 사비다. 주위 측근들도 금액에 대해 모를 정도였다. 정대선 씨의 부친은 작고한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으로 창업주 정주영 명예회장의 4남이며 정 이사장의 형이다.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 ROTC 정몽준 [출처=정몽준 '나의 도전 나의 열정']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 ROTC 정몽준 [출처=정몽준 '나의 도전 나의 열정']

당시 범현대가 일원들이 한차례 지원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그뿐이었다. 기업인으로 회삿돈을 사용할 수 없다. 정대선 씨의 자금 대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자금난은 심각했다. 하지만 범현대가 일원의 지원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정 이사장은 남달랐다. 형 정몽우 회장과의 돈독한 형제애는 조카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가 범현대가 큰 어른으로 존경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날 취재진이 내민 그의 저서 '기업경영이념'을 보고 그는 잠시 회상에 잠긴 듯했다. 정 이사장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가 책을 출간했던 나이는 서른하나. 이 책은 그가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재학 당시 석사논문을 책으로 엮었다. 무엇보다 그가 이 책을 가장 아끼는 이유는 '아산(峨山)' 때문이다. 정 이사장의 저서는 1982년 1월 출간했다. 그는 아산이 본인의 책을 읽었을 줄 알았지만, 자신에게 극찬이 쏟아질지는 몰랐다.

정 이사장은 그의 일생을 담은 '나의 도전 나의 열정'에서 당시를 부친과의 대화를 회상한다. 아산은 "아버지가 보기엔 노벨상감이다. 이참에 중공업에 가서 네 뜻을 한 번 펼쳐보거라"고 말했다.

이어 "니가(정몽준 이사장) 쓴 문 읽어봤다. 니말이 다 옳다. 기업은 지 혼자 저절로 크는 게 아니다. 기업 하는 사람은 처음 물건 팔릴 때의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된다. 배운 너야 유식한 말로 썼다마는 그게 다 그 말 아니야?" 덧붙였다.

아버지 정몽준과 아들 정기선 [출처=HD현대]
아버지 정몽준과 아들 정기선 [출처=HD현대]

아산의 찬사가 그의 서른 살에 현대중공업의 사장이 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됐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8남 1녀 가운데 여섯째 정몽준 이사장을 가장 아꼈다. 그런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경영자로서 남다른 혜안을 담았으니, 아산의 입장에선 남달랐을 것. 아비로서 느끼는 기쁨과 자부심이다. 정 이사장이 그의 저서를 보며 떠난 부친을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정기선 수석부회장은 이날 조부의 선영 참배에 불참했다. 해외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참배했던 그다. 정 수석부회장은 미국에서 그룹의 새로운 미래를 찾고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는 HD현대를 조선 산업을 넘어 방산·에너지 분야로 협력을 확대하며 시장 공략에 앞장서고 있다.

그간 '미래를 준비하는 경영'을 그룹 전략의 핵심으로 내세워 왔다. 단기 실적보다는 장기적 기술 경쟁력 확보에 방점을 찍고, 글로벌 산업구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체질 개선을 추진 중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으로 전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는 상황에선 중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취재진과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아버지(고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편, 권오갑 회장, 조석 부회장, 조영철 사장, 김성준 부사장 등 HD현대 주요 경영진은 지난달 15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에 위치한 정주영 창업자의 선영을 찾았다.

(사진 왼쪽부터) 정몽준 이사장과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 [출처=HD현대]
(사진 왼쪽부터) 정몽준 이사장과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 [출처=HD현대]

 

저작권자 © 이비엔(EBN)뉴스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