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비축기지에 여름배추가 쌓여있다. [출처=농식품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비축기지에 여름배추가 쌓여있다. [출처=농식품부]

기후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 정부가 농산물 수급안정 대책으로 내세운 '비축 역량 강화' 방안이 시작 전부터 실효성 논란에 직면하고 있다.

저장고를 늘리고 저장 기술을 고도화하겠다는 방향 자체는 타당하지만, 이를 떠받칠 생산 기반과 유통 구조에 대한 정비 없이 '비축'만 우선 추진될 경우 오히려 수급 공백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경남 지역 대형 산불로 상당수 농가의 생산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 긴급 복구나 구조 개선 대책 없이 '저장고 확대'만 이뤄질 경우 심각한 수급불균형을 키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24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정부는 현재 14개소인 비축기지 가운데 6개소를 매각하고, 3개소를 신규 신설해 '광역화·현대화'하겠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저장할 물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비축은 농산물이 존재해야 가능한데,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 불안정성은 해소하지 못한 채 저장 공간만 확대하면 결국 비워진 저장고만 늘어날 수 있다.

특히 비축은 평년 대비 '잉여 생산'을 전제로 하지만, 국내산 채소의 경우 수확량 변동 폭이 커 연간 생산 예측조차 어렵다. 생산량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설만 확대하면 '비축 실패 리스크'가 오히려 높아지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배추·무·양파 등 주요 채소 품목의 경우 비축 목표물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사례가 반복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역시 다수 보고서를 통해, 기후변화에 따른 작황 불안정성이 심화되면서 비축 대상 품목의 수급 자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현재 생산 환경에서는 무의미한 정책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지난 4월 초 발생한 경남 대형 산불은 단순한 산림 피해를 넘어, 인근 농가의 비닐하우스와 밭작물 기반까지 전소시키며 원예농산물 생산 자체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한 공급 차질은 몇 달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정부는 이 같은 생산 기반 붕괴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비축기지 확대' 방안은 생산 불능 상태에서 물류 창고만 짓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공급 원천이 사라졌는데도 저장 시스템 강화만 강조하는 것은 정책적 우선순위가 완전히 어긋난 것"이라고 꼬집었다.

기술적 결함도 있다. 정부는 저장 기한을 늘리기 위해 CA 저장기술(산소·이산화탄소 조절)을 도입 중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역시 기술 실증 단계에 불과하고 보편 도입까지는 최소 3년은 소요된다. 

CA 저장고 설치 비용은 3.3㎡당 약 300만 원, 일반 저온 저장고 대비 2~3배 이상이라는 점에서 중소 농가나 지역 농협 차원에서의 적용은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비축은 가격 급등 시 시장 개입 수단으로 기능하지만, 실제 가격 조절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농진청에 따르면 지난 2023년 봄과 가을, 배추 가격이 급등했을 당시 정부가 비축 물량을 방출했지만, 시장 가격은 큰 폭으로 오름세를 지속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정책의 핵심 오류로 '정책 순서의 역전'을 꼽는다.

비축은 '생산 기반 확보 → 저장 기술 적용 → 시장 유통 관리'라는 구조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데, 현재 정부는 마지막 고리부터 먼저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생산량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축 시설이 남게 되고, 저장기술이 확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장품질 문제가 발생하며, 유통 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방출 물량이 시장 가격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축'보다는 먼저 재배지 재설계, 농가 수급조절 기능 강화, 도매시장 유통 개혁 등 전주기 시스템 개편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저작권자 © 이비엔(EBN)뉴스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