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Icarus)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카로스는 미궁에 갇히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아들에게 달아준다. 밀랍 날개를 달고 탈출에 성공한 이카로스는 문득 새처럼 하늘을 나는 재미에 정신이 팔린다. 그래서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주의를 무시하고 만다.
자제력을 잃고 재미와 탐욕에 빠져 한없이 날아오른 이카로스는 결국 태양열에 밀랍 날개가 녹아 끝없이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 죽는다. 살기 위해 미궁에서 어렵사리 탈출했으나 탐욕 때문에 추락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극단적인 욕심을 좇다가 죽음에 처한 이카로스에게 많은 아쉬움이 묻어 나온다. 높이 오르려는 이카로스에게 좀 더 따끔한 경고를 했더라면. 태양 가까이 다가갔을 때 경보음을 울려줬더라면. 하늘에 Fly Cap(날 수 있는 최대한도)을 설정했더라면, 발목에 안전 밧줄을 매어줬더라면. 차라리 태양열을 견딜 수 있는 강한 날개를 달아줬더라면. 이러한 내부통제 장치를 강구했더라면 이카로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그러면 이카로스가 추락하지 않도록 누가 이런 아쉬움을 해결해 줄 것인가.
바로 감사(監事)다. 조직의 내부감사는 이카로스의 활동을 치열하게 모니터링하여 탐욕을 견제하고, 효과적인 통찰력으로 추락의 위기에 대처하여 이카로스를 보호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래서 감사 자리는 로데오 게임에서 날뛰는 황소를 진정시키는 카우보이처럼 항상 바쁘고 신산한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모 금융공기업의 상근감사 자리에 전 대통령실 행정관 A씨의 낙하산 취임 논란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금융공기업에 금융 또는 감사 전문가가 아닌 건설 분야 경력자를 상근감사 자리에 앉혀 함량 미달을 문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전 행정관 A씨가 지인에게 전한 공개된 통화 녹취록을 들어보면 감사 업무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필자의 억장이 무너진다.
"감사 자리는 그냥 만고땡이야. 감사가 사장보다 편하지. 제네시스 고급차 나오고 운전기사 붙여주고, 비서 하나 생기고, 법인카드 갖다주고, 연봉이 다른 공기업보다 좋아서 내가 찍었지. 3년 임기 보장이니 우리 정부 있을 때까지 있는 거지. 연봉 잘 받으면서 다음 대권에 누가 나올 건지 예의 주시해서 다시 올라타는 방법을 찾아야지."
'만고땡'의 뜻이 네이버 오픈사전에 있다. 온갖 괴로움을 뜻하는 '만고'와 끝이라는 은어 '땡'의 합성어로, 자신을 힘들게 하던 괴로움이 끝났을 때 쓰는 말이란다. 또 '만고땡 보직'을 줄여서 '땡보'라 별칭 한단다. 소위 편하게 일을 하는 직책이라는 거다.
그런 만고땡 감사 자리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자리라는 인식이 국민들 뇌리에 자리잡지 않을까 두렵다. 감사의 역할과 기능을 오해할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렇다면 감사 자리는 과연 만고땡 자리일까. 권력층에서 보은 차원으로 자리를 꽂아 주고 나눠 먹고, 임기 동안 좋은 대우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뜻을 펴기 위해 잠시 숨어 있는 자리에 불과한 걸까.
세계내부감사인협회(IIA)는 국제내부감사표준(GIAS)에서, ‘내부감사’란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검증(Assurance) 및 조언(Advisory)을 통해 조직 목표 달성에 도움을 주는 활동 △체계적이고 훈련된 리스크 기반 접근 방식(RBA)으로 지배구조∙리스크관리∙내부통제 프로세스의 효율성을 평가하고 개선시키는 활동 △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처하고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며 미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함으로써 조직 가치를 증진시키는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전엔 '감사'라고 하면 갑질, 강압, 적발, 군기, 처벌, 한건주의, 발목 잡는 곳 등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건 이미 죽은 단어가 된 지 오래다. 현대 글로벌 내부감사 기능은 IIA의 내부감사 정의에서 보듯이 부정 적발에 머물지 않고, 조직의 리스크 관리를 지원하고 조직 구성원의 동반자이자 컨설턴트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감사가 챙겨야 할 일이 많다.
이에 따라 상근감사는 내부감사부서의 독립성(간섭받지 않을 자유)과 감사인의 객관성(편향되지 않은 정신적 태도) 유지, 감사 전문성 확보, 리스크 감사기법 고도화, 감사 성과 평가 개선 등 내부감사 품질을 향상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잘 챙겨야 한다.
그리고 조직의 전략 및 정책, 이사회∙위원회 회의록, 업무 프로세스 등에 대한 검토를 통해, 조직의 지배구조∙리스크관리∙내부통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통찰력을 발휘해서 내부감사를 잘 이끌어야 한다.
달구지를 매단 소가 나아가지 않는다고 달구지에만 자꾸 채찍질하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소에게 채찍질하라며 지각없는 리더십에 찌든 경영진에게 그 방향을 바로 일러주는 것이 감사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사는 정보를 기다리지 말고 필요한 정보를 애써 찾아, 수시로 지배구조 프로세스를 통할하는 이사회와 소통하고, 리스크관리 및 내부통제 프로세스를 이끄는 최고경영진과 면담하여 적절한 견제와 조언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가령 사이버 보안 위험이 급증하는 정보를 살펴 최고경영진에게 관련 보안 인프라를 확충토록 조언한다거나, 최고경영진이 단기 성과 위주의 전략을 고집하여 직원들을 압박하는 경우에는 사고 우려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선제적인 리스크관리 및 내부통제 활동을 통해 안정적 성장을 도모토록 하는 식이다.
이처럼 감사의 책무는 무한대이고 임무를 잘못 수행한 감사에게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신분 제재를 부과하는 사례도 종종 있기 때문에, 감사 자리가 결코 '만고땡'일 수는 없다. 만약 감사 자리를 만고땡으로 치부하고 자리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면, 이는 명백히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내부감사에 대한 관심과 관련 인프라가 미흡하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삼정KPMG 감사위원회 지원센터(ACI)와 한국감사협회(IIA Korea)가 공동 조사하여 발표한 ‘2024 내부감사기능 서베이 리포트’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업은 내부감사부서 설치 의무가 없어서인지, 독립적인 내부감사부서를 설치한 기업은 8.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독립적인 내부감사부서 설치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응답이 59.1%가 나왔다. 미국은 상장기업에 내부감사부서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를 참고하여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상근감사 선임에 전문적인 자격 요건이 미흡하다는 점도 아쉽다. 상법에는 상근감사의 전문 자격 요건이 정해져 있지 않다. 금융사지배구조법에서도 감사위원 중 사외이사를 포함하여 1명 이상은 공인회계사나 감독당국 경력자 등의 자격 요건이 있으나 상근감사에 대해서는 전문 자격 요건이 정해져 있지 않다. 공공기관도 상근감사의 전문 자격 요건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전 행정관 A씨처럼 해당 기관의 사업 분야에 대한 경력이 없고 감사 업무에 문외한인 인사가 상근감사 자리에 취임 가능한 것이다. 이런 경우 정말 그 조직에 도움이 될지 의구심이 생기고 참 부조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감사의 전문성과 통찰력으로 조직 목표 달성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상근감사 채용 요건으로 풍부한 감사 경력자나 공인회계사 같은 필수 자격 요건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 등 일부 국가처럼 IIA가 공식 인증하는 국제공인내부감사사(CIA) 같은, 글로벌 감사 전문 자격증 소지자를 우대하는 제도적 장치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17일 한국감사협회 CIA위원회 정기총회에서 특별한 장면이 펼쳐졌다. 모 조직의 상근감사와 감사부장 몇 분이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공부한 끝에 마침내 내부감사 전문 CIA 자격증을 취득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내부감사 및 내부통제 발전 측면에서 참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지난 19대 국회부터 거론하고 있는 ‘공공기관 감사 낙하산 방지법’(‘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켜 감사의 전문성을 확보토록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도 되었다.
감사 자리는 조직의 존폐를 가름하는 막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결코 ‘만고땡’이 아니다. 국민과 주주와 이해관계자를 대신해 경영진이 조직을 잘 이끌도록 감시하고 조언하여 조직이 목적을 달성토록 도와주는, 겨를 없는 자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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