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지 세 달 가까이 돼가고 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영풍-MBK파트너스 중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다.
그러나 이들이 지분율 경쟁을 하는 동안 정작 지켜야 할 대상인 '고려아연' 자체는 멍들고 금융회사만 득을 보고 있다.
고려아연은 지난 10월 4일부터 23일까지 주당 89만원에 자사주 공개매수를 진행했다. 고려아연이 204만30주, 최 회장의 우군인 베인캐피털이 만든 특수목적법인(SPC) 트로이카 드라이브 인베스트먼트가 29만1272주를 사들였다.
고려아연은 여기에 1조8156억원을 투입했다. 이는 지난해 고려아연 영업이익 6599억원의 2.8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최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막대한 금액을 쏟아 부은 것이다.
정작 최 회장은 여기에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대신 고려아연은 공개매수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3조원에 가까운 금액을 금융권에서 빌렸다. 최 회장은 자신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재는 1원도 출연하지 않았지만 회사에는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들었다.
고려아연은 공개매수를 진행하면서 하나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서 1조6545억원을 빌렸다. 메리츠증권에서는 1조원을 차입했다. 총 2조6545억원에 달한다.
모두 만기 1년 이내 차입금으로 고금리다. 하나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서 최소 고정금리 5.5%, 최초 변동금리 4.67%로 빌렸다. 두 은행은 이번 대출로 약 772억~910억원의 이자를 얻게 됐다.
메리츠증권도 연 6.50%로 자금을 공급해 650억원의 이자를 벌게 됐다. 공개매수를 주관한 미래에셋증권과 KB증권도 32억원의 수수료를 갖고 갔다.
영풍-MBK도 마찬가지다. MBK파트너스가 설립한 SPC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는 1조5785억원을 NH투자증권에서 연 5.7%로 빌렸다. 연 이자만 899억원에 달한다.
문제는 대규모 단기 차입이 부채비율 증가 등 재무 건전성 약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회사의 대외 신인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고려아연의 신용등급을 낮추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지난달 29일 고려아연의 자사주 매입으로 재무 부담이 크게 늘었다며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고려아연의 현재 신용등급은 'AA+'지만 수개월 내 'AA'로 내려앉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렇게 되면 고려아연은 돈이 필요할 때 예전보다 더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고려아연은 공개매수하면서 진 빚을 갚기 위해 유상증자를 시도했었다. 일반공모 유상증자로 2조5008억원 가량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이 중 채무 상환에 2조3000억원을 쓸 예정이었다.
즉, 최 회장이 경영권 방어하기 위해 쓴 돈을 주주 돈으로 갚겠다는 것이다. 대규모 유증으로 기존 주주들의 지분율이 희석, 주주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이다. 다행히 이 계획은 시장의 빗발치는 비난과 금융감독원의 조사로 무산됐다.
경영권 분쟁이 3개월 가량 지속되며 직원들 사기도 땅에 떨어지고 있다. 최근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조사에 응한 고려아연 직원들 중 73%는 이번 경영권 분쟁으로 심리적 부담과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이직을 고려한다는 응답도 60%에 달했다. 인재 유출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연일 불기둥을 뿜어 대는 주가도 달갑지만은 않다. 고려아연 주가는 지난 5일 200만원을 찍고 다음날엔 203만2000원으로 마감했다. 영풍이 공개매수를 시작하며 경영권 분쟁의 서막을 연 9월 13일 66만6000원이었던 주가가 3배 뛰었다.
이는 기업의 펀더멘탈(기초체력) 향상으로 인한 게 아니다. 경영권 분쟁이 끝나면 주가는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파죽지세로 상승하는 모양만 보고 섣불리 투자에 나섰다가는 속된 말로 물릴 수 있다.
이번 경영권 분쟁은 내년 1월 23일 열리는 고려아연 임시 주주총회에서 결판이 날 전망이다. 최 회장이든 장형진 영풍 고문이든 승자가 누가 되든 그 누구도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양측은 회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고려아연의 재무 건전성을 훼손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소, 고발, 금융당국 진정 등을 수차례 제기하며 고려아연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최 회장 말대로 고려아연이 '국민기업'이 되려면 최대주주와 경영자가 먼저 회사를 진정으로 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