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투자 이종익 대표 [제공=한국사회투자]
한국사회투자 이종익 대표 [제공=한국사회투자]

국가경제성장 분야 전문가인 서울대 경제학과 김세직 교수는 저서 모방과 창조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흐름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약 30년간 고도 성장을 이룬 후, 지난 30년간 경제성장률이 5년마다 약 1%씩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한국도 곧 1%대 성장률, 나아가 마이너스 성장률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김 교수가 제시한 해답은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경제 성장이다.

현재 한국 경제는 대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GDP의 80% 이상이 대기업에 의해 창출되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이 과연 이러한 혁신을 주도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 역할을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고도 성장을 이끌었던 대기업들은 이제 "대기업병"에 걸려 있다.  조직은 비대해지고 관료화되면서 혁신을 추구할 효율성을 상실했다.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최근 고전은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은 무엇일까?  빠른 모방으로 성장했던 산업구조를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로 급속히 전환해야 한다. 이는 미국이 제조업 패권을 아시아 국가들에게 내어준 뒤에도 여전히 세계 경제의 리더십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이 이러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근면함으로 뭉친 스타트업들이 우리 경제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세계 4대 벤처 강국"을 목표로 벤처 육성에 나서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국내 시장이 협소하다는 점은 스타트업이 테슬라, 엔비디아와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큰 한계로 작용한다.  최근에는 초기부터 해외 시장을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이 늘어나고 있지만, 인력과 자본 등 자원의 부족이 현실적인 장애물로 남아 있다.  사업에서는 속도가 생명이다.  현재와 같은 구조적 한계 속에서 한국에서 글로벌 벤처기업이 탄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의 협업은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대기업은 자원과 네트워크를, 스타트업은 창의성과 민첩성을 제공함으로써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중요한 해법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협업의 핵심 전략이 바로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 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기업의 R&D 과정에서 외부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혁신을 가속화하고, 가치를 극대화하는 개념으로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이를 넘어 혁신적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과 대기업이 협력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영역도 R&D에 국한되지 않고 마케팅, 영업, 물류, 고객지원 등 대기업 밸류체인 전 과정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금의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다양한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들과 적극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을 실행하며 성장해왔다.  이번 기고에서는 스타트업이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아이디어 탐색과 계약 체결이다. 이는 대기업과 협력할 분야와 대상을 상세히 파악하는 과정으로, 성공적인 협력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대기업 밸류체인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대기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영역을 찾아 구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기업은 대개 내부 R&D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찾고 있다.  그래서 스타트업이 적절한 솔루션을 제시하면 협력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기업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외부와의 협력을 꺼리거나, 조직 내부의 약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는 스타트업이 적극적으로 대기업의 문제점과 솔루션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대기업 뿐 아니라 투자사,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발굴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삼성전자의 C-Lab이나 LG그룹의 수퍼스타트와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블루포인트, 더인벤션랩, 서울경제진흥원(SBA), 창조경제혁신센터 등에서 진행하는 스타트업 육성과 투자 프로그램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내 주요 스타트업 행사인 넥스트라이즈와 컴업에서도 오픈 이노베이션을 원하는 다양한 대기업을 만날 수 있다.

아이디어 탐색 과정에서는 밸류체인 내에서 스타트업의 역할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공동 R&D를 수행하거나 대기업의 시설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PoC(Proof of Concept, 가설 검증)를 진행할 수도 있다.  이 단계에서는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고, 목표를 협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기업은 보통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단축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주요 의사결정자가 참여하는 워크숍이나 프리젠테이션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협업에 대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면 바로 협력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다.   많은 스타트업이 계약 없이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협업을 시작하기 전에 상세한 역할과 책임이 명시된 협력 계약서와 기밀유지계약서(NDA: Non-Disclosure Agreement)를 체결해야 한다.  스타트업들은 협력 초기부터 대기업과 전략적 투자나 제휴를 맺으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투자, M&A, 기술 라이센싱과 같은 논의는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젝트가 성과를 창출한 후로 미루는 것이 더 유리하다.  초기 단계에서는 스타트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서는 상호 이익을 보장하고 분쟁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작성되어야 한다.  특히, 오픈 이노베이션 과정에서 발생할 주요 성과에 대한 내용도 계약에 포함되어야 한다.  특허와 같은 지적 재산권(IP), 공급 우선권, 인력 투입, 영업 수익 및 비용 배분 등이 공정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프로젝트에 소요되는 비용을 투자 등으로 제공받는 경우에는 투자 등 금융 조건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또한 계약서에는 위험 관리와 책임의 범위도 상세히 기술해야 한다.  명확하고 포괄적인 계약은 협력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리스크를 최소화하여, 오픈 이노베이션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두 번째 단계는 프로그램 설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를 확정하며, 협력의 실행 기반을 마련한다.  특히, 신제품 출시 일정과 같은 중요한 계획이 있다면 이를 고려해 협력 일정도 조율해야 한다.  필자가 투자한 한 스타트업은 식물 유래 친환경 패키지를 개발하고 있다.  식품 대기업의 신제품 출시 전략과 시기에 맞춰 원팀(One Team)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계획을 수립했다.  대기업의 시설이나 네트워크를 활용해 PoC 를 수행하려면, 사용할 시설이나 협력 네트워크를 사전에 구체적으로 확정해야 한다.  오픈 이노베이션에 동의하고도 실제로 시설을 개방하지 않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대기업과의 실무 소통이 성공의 핵심이다.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리는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복잡하고 높은 관료주의의 벽에 좌절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기업 내에서 추진력이 강하고 실행력이 있는 담당자가 중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실행 계획을 수립할 때는 주요 단계별 세부 실행 과제를 구체적으로 도출해야 한다.  양측의 역할과 책임, 담당자, 일정, 그리고 산출물을 포함한 세부 KPI가 명시된 실행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대기업 제조시설을 활용해 파일럿 생산을 진행하려는 경우에는 생산 조건과 같은 세부 사항까지도 면밀히 고려되어야 한다.

만약 양측 제품을 패키징하여 공동 판매를 계획한다면, 제품 및 패키징의 사양과 같은 세부 내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한 스타트업은 유통 대기업의 신선채소 유통의 약점을 발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설계를 진행한 사례가 있다.  이 스타트업은 유통사의 물류센터 옆에 소규모 파일럿 스마트팜을 구축했다.  이곳에서 AI와 로보틱스를 활용해 고부가가치 채소를 재배했고, 생산된 채소를 유통사의 물류라인과 통합하는 방식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이와 같은 방식은 기존 유통망 대비 신선도를 크게 높이고 물류 비용을 혁신적으로 줄이는 장점을 제공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실행 및 확장이다. 이 단계에서는 두 번째 단계에서 설계한 오픈 이노베이션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 확장 가능성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사업 재편을 추진 중인 LG화학은 스타트업과의 오픈 이노베이션 결과를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 신속히 진출하며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계획을 세워도 실제 실행 단계에서는 다양한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기업 문화의 차이다.  대기업은 완벽한 계획과 안정적인 실행을 선호하는 반면, 스타트업은 민첩한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며 사업을 고도화하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얻은 성과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사업 전략과 수익 모델에 반영해야 한다. PoC 결과와 수익 및 비용 효과를 분석해 기존 제품을 고도화하거나 신제품 출시 전략에 활용할 수 있다.  때로는 여러 회사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건설 노동자를 건설사와 연결하는 사업 모델을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건설사와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었다. 이 모델은 건설 노동자의 노임 지급과 신용 정보를 기반으로 금융 서비스를 개발해 은행, 카드사, 보험사와 연계된 혁신적인 상품을 출시하며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AI) 기반 시각보조 시스템을 개발한 한 스타트업은 통신 대기업과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제품의 품질과 가치를 크게 높였다.  스마트캠으로 인식된 다양한 영상 정보를 5G 통신망으로 받아 AI가 분석한 결과를 스마트 글라스에 제공하는 서비스를 완성했다.  이외에도 정교한 센서와 AI 기술로 실내 환경을 최적화하는 솔루션을 개발한 스타트업은 건물 관리 및 보안을 전문으로 하는 대기업과 협력해 수익 모델을 결합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수익을 나누는 방식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확장을 성공시켰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그 결과를 토대로 사업 확장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장기적인 로드맵을 수립해 사업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확보된 지적재산권(IP)을 확대하거나 라이선스 아웃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도 있다.  더 나아가 합작 투자나 합작 법인 설립도 고려할 수 있다.  대기업은 경우에 따라 스타트업을 인수해 통합 조직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실제 구글은 지금까지 약 300여 개의 스타트업을 인수하며 성장했고, 애플도 1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을 인수해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중 많은 기업이 오픈 이노베이션 과정을 통해 인수된 사례들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처럼 대기업, 스타트업이 뭉쳐야 한다.  대기업은 과감히 자신의 밸류체인을 열고 스타트업을 사업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존의 N차 벤더나 하청업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스타트업을 진정한 사업 파트너로 인식할 때 예상치 못한 시너지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스타트업 역시 대기업 밸류체인을 철저히 파악하고,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우리 경제는 1990년대 이후 지난 30년간 하락세를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창의성과 혁신의 액셀러레이터를 다시 밟아야 할 때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오픈 이노베이션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국내외 여러 외부 변수로 사업 환경이 녹록지 않지만, 그럴수록 희망의 끈을 단단히 붙잡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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