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N 자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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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대한 사람이 있다. 인생에 있어 펼쳐질 위험을 보수적으로 촘촘히 관리하는 자가 있다면, 삶을 낙관적으로 보고 모험에 뛰어드는 이도 있다.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사람의 삶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위험 관리냐, 도전이냐'다. 한국인이 대체로 모험에 인색한 이유는 어릴 때부터 '안전빵'을 교육 받으며 자라서다. 피차 인생이란 답이 없는 영역. 어떤 인생이 더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는 것.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과 결실은 오롯이 내 몫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전제만 있을 뿐.

[제공=연합뉴스]
[제공=연합뉴스]

금융당국이 '좋은 보험사'의 기준을 만든단다. 당국 기준에선 '좋은 보험사'란 뭘까. 보험 경영을 비관적으로 보고, 혹시 닥칠 미래의 변동성을 위해 넉넉하게 자산을 쌓아둔 보험사가 좋은 보험사다. 보험소비자에게 충분히 보험금을 내줄 수 있는 자격을 '좋은 보험사'로 보겠다는 얘기다. 여기까진 납득이 된다. 소비자를 보호해야 하니까.

이후부터가 문제다. 금융감독원은 보험사가 평가한 보험계약 가치를 못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좋은 보험사'를 권장하던 금감원이 이젠 '좋은 보험사'를 의무화할 것처럼 '보험개혁회의'를 진행 중이다. 통계기관이 정부 방침에 맞춰 국가 통계 및 성장률을 제시했다는 쌍팔년도 스토리가 보험업계와 금융당국서 벌어지고 있고 있는 것일까.

IFRS17 제도 개선 방안은 보험사 회계를 당국의 보수적 기준에 맞추겠다는 게 골자다. 핵심 안건은 무·저해지 상품의 위험액 산출 방식 변경이다. 보험사 지급여력제도(K-ICS·킥스) 비율을 산출할 때 무·저해지 상품이 가진 위험을 더 크게 반영하려고 한다.

국내 손해보험사 로고 [제공=각 사 홈페이지]
국내 손해보험사 로고 [제공=각 사 홈페이지]

이 결과 보험사는 무·저해지 상품에 대한 회계처리 때 일반 보험 상품보다 더 보수적인 잣대를 써야한다. 더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다. 또 관련 상품 판매 경쟁 과열을 막기 위한 사업비에 대한 규제를 더 받게 된다. 적용 시점은 올해 말 결산부터다.

문제는 금융당국이 이러한 규제 기준을 '무 자르듯' 하겠다는 발상이다. 금감원이 '가르마'를 타 줄 작정이다. 특히 무·저해지 상품의 해지율에 전 업권 동일 모델을 적용해 그동안 논란이 된 '고무줄 회계'를 정리하려고 말이다. 손해율과 해지율 가정을 대폭 바꾼다는 뜻.

김남희 EBN 금융증권부 차장
김남희 EBN 금융증권부 차장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대부분의 보험사가 손실을 본다. 보험계약마진(Contractual Service Margin·CSM)이 줄어들 뿐 아니라 보험사 몇 곳은 손실계약이 대거 발생해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

당국이 보험사 미래경영을 부정적으로 보겠으니 보험부채가 늘어날 거고, 자본을 더 넉넉히 쌓으란 얘기다. 어느 보험사는 자본비율(킥스·K-ICS)이 30~40%포인트 넘게 추락해 당국 권고치(150%)에 미달할 것이라는 추정도 들린다.

회계에 있어 금융당국이 이렇게 초강수를 두는 이유도 이해된다. 보험사들이 미래를 장밋빛으로 보고 실적을 부풀려서다. 미래를 너무 낙관한 나머지 일종의 분식회계로 이해될 수 있다. 회사 장부를 조작하는 행위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다. 현재 많은 보험사가 무·저해지 상품 해지율을 지나치게 높게 예측해 보험 계약 마진을 크게 예상하고 있어 회계상 이익을 부풀리고 있다는 것이 당국의 지적이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4차 보험개혁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제공=연합]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4차 보험개혁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제공=연합]

당국의 이런 개편안을 놓고 손해보험사들은 입장이 갈린다. 대부분의 손보사가 미래경영을 낙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당국 안에 반대하는 한편 메리츠화재는 웬일로 당국에 찬성한단다. 보수적으로 보험 계약을 관리한 까닭에 당국 입장과 맞아 떨어져서다.

특히 삼성화재, DB손해보험, 현대해상, KB손해보험, 한화손해보험, 롯데손해보험, 흥국화재, 하나손해보험, NH농협손해보험, MG손해보험 등 10개 손해보험사는 무·저해지 해지율 개편을 통해 자본건전성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다.

반면 메리츠화재는 일찌감치 자본금을 준비하고, 해당 상품도 덜 판매한 탓에 여유로운 입장. 금감원의 보수적인 기준이 경영에 타격을 주지 않는다.

업계에서는 금감원이 검토하는 개편안이 메리츠화재의 데이터가 활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메리츠와 당국이 어느 정도는 교감했다고 본다. 이에 메리츠는 "보험 손해율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고 답한다.

과연 금감원은 현실과 동떨어진 모형으로 매우 이상적인 보험사 상(狀)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2의 MG손해보험이 나오지 않도록 위험 관리에 초집중하는 것일까. 메리츠화재 대 10개 손보사로 갈리는 이 게임의 룰을 금감원은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시장 설득 없이 밀고 나갈 것인가. 삼라만상 원칙이 작용하는 은행 금리에 개입한 이복현 금감원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5일 "은행 예대금리차는 연초보다는 작은 수준이나 최근 몇 달 동안 확대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제공=연합]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5일 "은행 예대금리차는 연초보다는 작은 수준이나 최근 몇 달 동안 확대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제공=연합]

선진국은 이런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까. 업계에 따르면 북미와 유럽 보험사는 보험사 회계와 보험계약계산을 독립적으로, 분리해 평가한다. 보험사 1년짜리 경영 회계와 수십년 짜리 보험계약 가치산출은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외부감사인인 회계법인 한 곳이 보험사의 이 모두를 살펴본다. 문제는 회계법인이 보험사 요구(갑질)를 들어주는 '을'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현재 회계법인과 감사를 받는 상장기업은 사실상 ‘갑을관계’다. 회계법인과 피감사 기업 간 계약이 자율 수임 형태여서 일감을 따내야 하는 회계법인으로선 독립적 감사 수행이 어렵다. 

감사를 받는 보험사 입장에서 회계법인에 잘 보여야하겠지만, 계약 연장 기간이 다가오면 갑을 관계가 바뀌기 마련이고, 이 회계법인이 보험계약자산을 보수적으로 산출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물론 회계법인과 기업의 유착관계를 피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의무적으로 감사 회사를 바꾸도록 하는 법도 있지만 삼일 PwC 등 4대 회계법인이 대형 보험사 회계감사를 돌아가며 맡는 상황은 이미 굳어졌다.

그래서 당국이 보험사 계리를 100%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도 분명 이해된다. 기업의 위험한 성적표 조작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도 납득된다. 그럼에도 금감원이 확실한 회계 가르마를 타주는 것이 정답일까. 

자칫 당국이 나서면 기업의 자율경영과 한국 보험사 밸류다운(value-down)을 초래할 수 있다. 찬반 '1대 10'이란 숫자는 지나치게 극단으로 내몰렸다. 금융당국의 결정이 하나뿐인 승자를 만들고, 나머지를 패자로 만들 수 있다.

당국의 직접 개입보다 선진국처럼 보험사의 회계법인과 통계 전문가를 통한 관리감독도 방법이다. 정치가 김대중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관치(정치)는 국민보다 '반보'만 앞서야 한다."고 했다. 현실과 이상, 모두를 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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